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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0:13

고후 10:13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1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설교>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형태를 보면 스스로 구원의 담지자로 행세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확인하려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각각 개인의 특성과 생활의 다름이 사람에 대한 평가와 차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을 향해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몸이 약하고 강한 것은 육신을 가진 개인의 특성이고 다름일 뿐인데 그것을 우월과 열등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일입니다. 누구도 예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있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여 해석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윤리와 도덕이 아닌 복음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말은 언제나 윤리와 도덕의 시각에 굳어져 있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고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한 말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우리는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해도 인간으로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육신의 특성과 조건을 따져 사람을 평가하는 자들을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관대하고 타인보다 우월한 자기 모습을 기준으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합니다. 이것이 아담 안에 있는 우리가 잘하는 특기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인간 됨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러한 인간 됨을 통과하여 신자에게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복음에 의해서 우월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의 무너짐을 경험하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가난한 자로 주 앞에 서게 됨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정리되고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이 역사하고 복음을 알게 되면서 오로지 저주받을 자라는 그 한 가지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3:13절에 보면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확인이 있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죄 용서와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저주라는 자기 확인이 없이 용서와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 사랑 안에서 자신을 위한 예수를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말하나 복음 밖에 있는 것이고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지혜 없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는 말처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여기에 개개인의 육신의 특성과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몸이 약하든 강하든, 말이 시원치 않든 시원하든 죽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평가이고 선언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삶을 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저주가 아닌 삶을 얻은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복음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로 인하여 자신이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것인데 여러분이 처음 들은 내용은 아닙니다. 매주 설교 때마다 들었던 귀에 못이 박였다고 할 정도로 익숙하고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단지 이론으로 접하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현재의 우리가 어떤 자인가를 확인하게 하고 지금 나의 자리, 즉 인간의 실존에서 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복음으로 드러나는 일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칭찬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 아닌 자신의 우월한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며 자기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 복음으로 드러나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엄중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보게 되면 단지 사람을 자기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반적인 문제로 다가오겠지만 복음의 시각으로 보게 되면 복음을 훼방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13)는 말의 의미도 인간의 본래 자리, 실존의 문제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분수 이상의 자랑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범위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저주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저주라는 실존의 자리에서 자신을 확인한다는 것이고, 분수 이상은 저주가 아닌 육신의 자리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헤아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1-2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 22:3-4에서는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저주 받은 인간의 운명은 지옥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이 정죄가 없고 저주가 없는 생명의 나라, 천국으로 전환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에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 부름을 받은 자가 그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지옥이 아닌 천국을 가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나 힘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선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증거 하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의 존재가 천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선택이 실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 있게 된 내막이며 이유입니다. 이유가 우리가 아닌 예수께 있다는 것입니다.

 

 

24:8절을 보면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렸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가 효력이 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리하게 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언약의 피 앞에서 인간 개개인의 특성과 육신의 모습이나 조건은 무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육신을 기준으로 인간을 우월과 열등으로 헤아리고 차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이나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의의 세계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인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영적 관계가 아닌 자기를 바라보는 육신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현대 교회는 도무지 인간의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자기를 칭찬하는 분수 이상의 자랑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랑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그 어떤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해도 천국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일반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하지만 교회가 천국의 통로가 아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보이는 소위 건전함이라는 것도 자랑거리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범위의 한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한계입니다. 우리가 피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면 자기 자랑은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기 자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항상 자기 자랑을 일삼는 자신을 보면서 저주라는 실존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6:14-15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로 이루어진 것은 누구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으로 이루어진 일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이 이루어졌든 그것과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피가 생명이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비록 우리의 입술은 십자가를 향해 있고 복음을 따라간다 해도 삶은 나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의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는 평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몸도 말하는 것도 개개인의 육신의 특성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나게 하신 대로 난 것이라면 육신의 모든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차별한다면 인간에게 서로 다른 모습과 특성을 주신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육신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강함이 천국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육신의 모든 것은 허무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내가 우월하다는 근거로 삼는 모든 것이 허무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천국에서 인정되지 못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분수를 알고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감사의 내용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신자는 누구나 예수께 속한 자로 구원받습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빈손에 예수님이 나눠주신 피의 은혜만 들고 주께로 오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의 본질이고 특성이기 때문에 우열도 열등도 없는 지체의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입니다.

 

 

16:3절에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라고 말합니다.

 

 

고라와 온이라는 사람이 레위 사람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항변한 것입니다. 이유는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너희만 제사장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명분은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를 높인다는 것이지만 속마음은 자신들도 높은 자리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높고 낮음으로 계산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잘못은 제사장 역할과 성막에서 제사장을 돕는 일에 차별을 둔 것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말한다면 목사의 일과 일반 신자의 일에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목사의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반 교인으로서의 자기 일을 작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 대해 모세는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16:8-9)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는 작은 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각기 하나님이 주신 분량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월과 열등이 없는, 다만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오늘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은혜가 감사가 되는 신자로 사는 것이 신자 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천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까지 이른 바울이 증거 하는 십자가 복음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우리의 옛사람의 활동을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우월감에 빠져있는 모습에 몸서리가 쳐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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