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8.19 16:36

(16강) 그리스도의 마음

조회 수 25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2:15-16http://onlycross.net/videos/co1/co1-0215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설교>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이론이 있는데 이를 교리라고 말합니다. 이 교리는 새벽에 물을 떠 놓고 천지신명을 부르며 ‘비나이다’라고 하는 민간신앙에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정성껏 구하면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 그 사람의 기본적인 이론, 즉 교리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교리를 달리 하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구세군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교파로 나누어진 것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진리로 규정한 신앙 형태가 다름으로써 발생한 결과입니다.

 

 

나와 교리가 다르다고 하여 백안시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특정 교파의 교리가 진리의 기준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교리가 좀 더 성경에 바르게 접근하여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교리도 결국에는 성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조직신학에서는 종교의 좌소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의 좌소도 마음이라고 합니다. 한 마음에 믿음과 죄가 함께 자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신앙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요? 한 마음에 믿음과 죄가 있다면 믿음이 죄를 물리침으로써 죄의 행동을 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이 곧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음과 죄가 함께 한다면 믿음이 죄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은 죄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죄의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하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거룩한 신자로서의 존재론적 기쁨도 상실되는 결과만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 7:19-2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믿음이 있기 전이 아니라 믿음이 있은 후에 자신을 두고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과 죄의 좌소가 마음이라는 교리적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면 바울 역시 믿음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만을 향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받은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런 말을 들을수록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자신은 도무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처럼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자답게 거룩한 마음으로 죄와 멀어져 선을 행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기에 ‘나는 신자가 아닌 것이 아닌가?’‘내가 과연 예수 믿는 자인가?’라는 절망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나, 즉 인간에 대한 오해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한 오해로 가득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오해는 곧 나에 대한 오해를 뜻합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께 부름 받아 거룩한 성도된 신앙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풍성함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큰 문제로 자리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자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말할 때 주로 생각하는 것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겸손과 온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에게 학습되어 있는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은 높이며 존중하는 태도이고, 온유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이처럼 학습되어 있는 대로 이해함으로써 신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을 항상 자신을 낮추고 화를 내지 않으며 늘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닌 여전히 인간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로 인해서 혼란과 절망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이러한 혼란과 절망을 경험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먼저 말씀을 드릴 것은 인간은 자기로 인한 탄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죄를 이기고, 마음은 항상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착각이고 헛된 환상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죄로 인한 탄식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존재하는 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이고 항상 죄에 굴복하여 악을 행하는 것 또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과 온유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라는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바른 이해가 없이 다만 이론으로만 학습되어 있는 교리 또한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신앙의 양상과 그 방향 자체가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신자가 가진 것이라면 바울도 탄식하게 만들었던 죄의 마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죄를 행하는 것과 함께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행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논리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은 성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온유고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빌 2:5-8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예수의 마음이 우리가 품고자 한다고 해서 품어지는 것일까요?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기존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교체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의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거나 예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면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된 신자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로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실천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 마음을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 또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알게 되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며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신 은혜와 사랑을 알았기에 서로를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무엇이 육신으로 사는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하는 것은 온유와 겸손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세상을 보는 것이 신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육에 속한 것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것에 소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한 길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는 길이기에 아무도 가지 않고 찾지도 않은 길을 홀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알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자 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원과는 다르게 세상 영광에 미련을 두고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좇아 사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롬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바울과 같은 탄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자신에게서 죄를 보고 그 죄로 인해 탄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하셨기에 가능한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신자에게 탄식은 탄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망의 몸에 갇힌 곤고한 사람으로 탄식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는 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탄식이 바울에게서 감사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롬 8:1,2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에서 드러난 것처럼, 바울은 죄를 보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복됨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 담겨진 중심 의미는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결국 악을 행하는 자로 말합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능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되어진 모든 것을 주님이 하신 일로 규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일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자는 성령을 받은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육신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을 바르게 분별하게 되지만 세상은 신자가 누구인가를 모르기에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판단을 받게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이 신자이기에 영적인 사람이며 신령한 자입니다. 성령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091
2010.01.01 511 로마서 로마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65273
2010.01.01 510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42463
2010.01.01 509 사도행전 사도행전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41276
2018.08.14 508 마가복음 마가복음 신윤식 30693
2010.01.01 507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30540
2010.01.01 506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091
2018.08.13 505 야고보서 야고보서 신윤식 19656
2010.01.01 504 마태복음 마태복음 성경강해 1 은석교회 17070
2010.01.01 503 히브리서 히브리서 성경강해(음성설교 다운 가능) 1 은석교회 15405
2018.11.24 502 마태복음 마태복음 69강 이전설교 신윤식 13510
2013.09.27 501 빌립보서 빌립보서 강해(음성) 신윤식 12485
2010.01.01 500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10558
2010.01.01 499 요한1서 요한일서 성경강해(음성파일 다운 가능) 은석교회 9817
2010.01.01 498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9651
2010.08.30 497 마태복음 (102강) 칠병이어 신윤식 9350
2009.12.29 496 마태복음 (69강) 복음으로 사는 길 은석교회 8779
2011.01.16 495 마태복음 (121강) 천국과 고자 신윤식 8417
2012.10.07 494 누가복음 (31강) 예수로 인한 실족 신윤식 8218
2013.07.23 493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강해(음성) 신윤식 8066
2010.10.18 492 마태복음 (109강)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신윤식 729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