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9.16 15:47

(20강) 자기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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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설교>

신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방향과 본질을 설정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신앙은 종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이 영생을 본질로 한 참된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신앙에 대해 말할 때 이 점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이 시작점이 되는 종교의 모습만 나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행함과 열심을 근거로 해서 신앙을 판단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시작점이 되는 종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신앙이란 부족하고 미흡한 상태의 시작이 아니라 완성의 상태에서의 시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뜻을 세우시고 계획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는 실패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신앙은 그 자체로 완성이고 온전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신앙의 시작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간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육의 사람 역시 신앙의 시작을 인간에게 두고 인간의 능력과 힘에 의해서 신앙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성령이 오셔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육의 사람이 생각하는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고 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인간의 불의함에 눈을 뜨게 하여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합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오직 하나님만이 일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절)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작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고 성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영적인 일인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능력과 자질과 성품과 행함을 기준으로 하여 신자다움과 신자답지 못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 아래에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는 특정인을 중심으로 하는 분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그의 능력과 업적과 신앙의 수준을 판단하면서 높이고 추종한다면 자신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조차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서도 수시로 드러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살펴본다는 것은 곧 우리의 문제를 살펴본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은 마치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이지만 그래도 각각 자신이 일한 대로, 즉 일한 만큼 상을 받는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비록 하나라 할 수 있어도 하는 일에서는 각기 다르고 차이가 있기에 그 차이에 따라 각기 받는 상이 다르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신앙의 시작을 인간에게 두는 육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일 뿐입니다.

 

 

먼저 상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의 개념에서 생각하는 상은 칭찬할만한 행위에 대한 포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개념으로 성경에서 언급되는 상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에 신자로서 칭찬할 만한 신앙 행위나 열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포상하시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창 15:1절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곧 아브라함의 방패고 상급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아브라함은 자기를 위하여 다른 방패, 다른 상급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을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상을 기대하고 원한다면 하나님의 존재 가치를 세상의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온 세상이 추구하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실 정도로 잘한 것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인간성은 전혀 고려하신 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라고 말씀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방패고 상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를 악한 세력이 공격하여 사망으로 끌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보호 아래 있어서 사망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복된 세계에 들어와 있기에 그리스도가 방패가 되고 상이 되는 신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영생을 받은 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에게 상은 영생입니다. 사망이 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상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상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상에는 차등이 없이 동등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상’은 각기 주어지는 상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심는 일을 한 사람은 심는 일을 한 대로, 물 주는 사람은 물 주는 일을 한 대로 상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한 것을 두고 비교하고 경쟁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일한 대로’라는 말의 의미 또한 각자 주어진 일을 한 것만큼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은 모두 동등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6,7절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역할은 다르다 해도 그 역할의 가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역할, 하는 일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하는 역할이나 하는 일을 보면서 특정인을 높이고 추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다. 교회는 여러 지체가 있고, 교회에서 하는 일이나 역할도 다릅니다. 가장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목사와 일반 성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목사의 역할과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성도라는 관계에서는 동등합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20)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목사의 역할이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심는 일을 목사가 하는 일로, 물 주는 일을 주일 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일반 성도가 교회의 식상 문제와 청소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에서 생각해 보면 역할의 다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떤 역할도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 차이는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시각으로 교회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습성이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고 차별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동등하다고 하면서도 결국 권력과 명예의 기준과 시각에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말씀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역할이나 행하는 일들이 공로가 되고 신앙의 수준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공로와 의로 존재하는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 말씀으로 알고 경험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반드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 일에 대한 개념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일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의 가치와 결과에 따라 구분하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 중요한 일을 한 사람과 덜 중요한 일을 한 사람으로 구분하면서 자기의 상이 다르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이것이 합리적이고 아주 타당하며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한 것만큼, 그리고 이루어 낸 결과만큼 보상을 받고 인정받는 것이 세상의 질서고 세상이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든 곳은 이러한 기준과 방식으로 다스려지고 유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역할과 일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일 때만 통용되는 것이지 바울의 말처럼 자라는 것이 심고 물을 주는 일로 의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되어진 것이라면 심고 물 주는 행위나 그 일을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다스림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의미는 특별히 사도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심는 이, 물 주는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심는 일도 물 주는 일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나 다른 성도들이 예배당에서 청소하고 식사준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와 성도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고 일의 경중을 비교하여 사람을 차별하고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사람의 업적으로 높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자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말하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말하지만 동역자이기 전에 그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을 동역자의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이 곧 상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관계로 있는 것이 신자의 지위이고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동행시키고 계시는 것이 신자의 존귀함이기에 어떤 역할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그 가치는 동일한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신자라는 존재에 담긴 가치와 존귀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어떤 상을 받을지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도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밭과 하나님의 집을 사도에게 맡겼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시작을 인간에게 주고 인간에게 모든 중점을 둔 육의 사람인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밭과 하나님의 집이라면, 관리하시고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곧 고린도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에 의해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볼로나 바울을 추종할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품꾼이 자발적으로 포도원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가서 불러들인 것입니다. 품꾼들이 부름 받을 때는 품삯보다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집과 밭에서 일하게 된 것을 영광과 상으로 아는 마음일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신자로 부름 받아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는 것이 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 상을 무시하고 세상의 삶에 형편과 조건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상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이미 상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 또한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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