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0.07 15:41

(23강) 자신을 속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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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설교>

신자가 복음을 알았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들렸음을 알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와 신앙의 다른 점을 또 다시 생각해 보자면 종교는 자신이 신앙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책임지는 주체자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자신이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을 위한 도구, 종으로 부름 받았음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자신을 붙들고 주관하면서 자기의 뜻과 상관없는 길로 끌어가는 힘이 있음을 인식하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주관하는 힘이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신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절대적 권세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벗어날 수 없고 결국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절대적 권세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살아온 것이었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의 보이는 힘을 진정한 힘으로 여기지 않으며 두려움의 대상도 아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특정한 인물의 능력이나 힘, 또한 조건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강함과 약함으로 나누는 시각 또한 없는 것이 신자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을 말하되 믿음의 길로는 가지 않는 허무하고 헛된 믿음만 추구한 것은 아닌지를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9: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 자신의 일을 부득불 할 일로 말합니다. 바울의 의지와 뜻으로 바울이 행하여 이루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주관하는 힘에 의해서 하게 된 일이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바울이 잘한 것이 아니라 바울로 하여금 하게 하신 권세자의 힘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보이지 않는 힘, 권세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 권세가 자신을 주관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할 수 없게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개입된 결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인식 기준이었기 때문에 ‘내가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고 사람이 행한 일과 업적을 따져서 누군가를 특별히 높이고 추종하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이고, 또 그것을 믿는 것이 신자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신자의 삶에서 표출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신자의 삶에서 표출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도적적인 삶이나 종교적 생활의 실천 등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열매, 증거를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마귀가 준비한 함정일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믿음으로 존재하는 신자의 삶은 당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 다스림 받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사람의 의지와 뜻에 의한 행함을 부인하기에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특정 인물을 높이고 추종하지 않는 것 또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깊이 주지해야 할 내용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로 인정되는 것이기에 목사든 누구든 높임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을 향해서 목사를 섬기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고 교인 역시 목사를 섬기면 복 받는다는 허구에 속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욕망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충고하고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무엇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분파를 배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던 분쟁과 분파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한 것은 위대한 인물로 인정되는 특정인을 추종하고 높임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누구에게 복음을 들었든 복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멈춰 버리는 큰 잘못을 범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누구를 따르든 그로 인해서 그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설사 그리스도를 따른다 해도 사람이 달라지거나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아볼로를 다르지만 나는 바울을 따른다. 때문에 내가 더 옳다’‘너희는 바울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다르지만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옳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것을 두고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더러움이고 불의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본질이 사라지고 다른 본질로 교체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맞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서는 불의한 죄의 모습이 나와져서는 안됩니다. 아예 본성 자체에서 악함을 찾아볼 수 없어야 합니다.

 

 

때문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서 인간의 본성이 교체되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다만 믿음은 인간의 본질이 악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하면서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에만 모든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불의한 우리가 그리스와 연결됨으로써 거룩한 몸으로 여김 받으며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파가 생긴 이유를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분파는 사람을 차별하고 추종하는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분파 또한 믿음과 연결된 문제로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일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믿지 않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믿는다고 하지만 그가 행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권세와 무관하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린도 교회와 같은 분파입니다.

 

 

세상의 권세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권세는 보이지 않고 권세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의 권세는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세를 잊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권위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것이고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자신 또한 권위 있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6,7절)는 말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일한 것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모든 마음과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충고하는 말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든 아볼로에게 들었든 비록 복음을 들은 사람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것은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사람을 따라 나눠 질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취지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나는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으니 됐다’‘나는 아볼로에게 들었으니 됐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복음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아볼로에게 복음을 들은 너희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사람을 추종하지 말라’든가 ‘분파를 없애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고 바로 여러분의 문제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나에게는 분파와 같은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다만 ‘멸망 받아야 할 불의한 존재’그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십자가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면 문제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문제를 앎으로써 적어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신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십자가를 안다는 생각 자체를 접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는 말로 권면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곧 지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본다면 ‘나는 너보다 괜찮은 존재다’라는 차별과 우월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고 분파 또한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들이 서로 복음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하는 입장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라면 신자가 모여서 성경을 이야기 할 때 자칫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은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는 것은 경쟁이 되고 힘이 되고 우월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고 존재 법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세상의 이러한 모든 원리와 법칙을 초월해 있습니다. 복음을 안다 해도 그 앎은 경쟁이나 힘이나 우월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한 개인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에 목적이나 방향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늘 타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자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 욕망에 의해 복음조차도 자신이 가졌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구일 뿐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알았기에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복음을 많이 알고 적게 알고의 차이도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가 머리에 암기해 두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권세가 되어 ‘나는 신자다’라는 자기 긍정을 깨뜨리고 ‘내가 신자인 줄 알았던 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자기 부정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복음에 대해 어리석은 자로 보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권세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믿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가 여러분을 믿음의 자리에 있게 한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복음을 아십니까? 그 또한 하나님의 권세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적으로 어리석은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이고자 한다면 볶음을 말한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도 아니라 권세로 여러분을 다스리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그것이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신자의 본분입니다.

 

 

롬 14:3-4절을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복음 위에 세우시는 권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복음 위에 세워진바 되었다면 복음 위에서 실감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사람도 사람의 권능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복음을 알게 된 것이 우월의 이유가 될 수 없음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조건으로 하든 자신을 다르게 본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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