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3 19:28

(66강) 사도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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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21-27

고후 11:21-27http://onlycross.net/videos/co2/co2-11212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설교>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바울이 마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을 내세워 자신의 사도 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너희 중에 복음을 위해서 나만큼 고난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며 큰소리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난을 자기 의로 내세우며누가 더 사도다운가?’라는 싸움에 합류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바울이 겪은 고난은 고난 자체만 두고 생각하면 육신의 수고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수고가 많은 사람을 믿음이 좋은 신자로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으로 고난을 겪은 바울을 훌륭한 사도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도 마치 바울이 자신의 사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난 겪은 일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말하는 것은 고난을 사도다움의 기준으로 내세워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한 자들을 이기려는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바울이 그런 의도로 고난을 언급한 것이라면, 결국 거짓 사도의 육신에 따라 싸우는 싸움에 바울도 고난을 자기를 높이는 무기로 삼아 끼어든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고후는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1:1)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편지를 쓰는 요식적인 말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직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에는 사도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도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고 활동하기에는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스데반을 죽이고 믿는 자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는 시비도 받았습니다. 여러모로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시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입니다.

 

 

만약 바울이 육신의 외적인 조건을 따지며 자신을 비난하는 무리에게 육신의 조건으로도 사도 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내세운다면 바울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과 선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사람들이 수긍하고 인정할만한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사도로 부족하다고 의심하는 외적 조건을 상쇄할만한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사도는 그런 외적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사도 됨에서 벗어난 어리석고 무지한 시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라는 말을 하면서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22)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 후손 이런 것은 이스라엘 내에서는 정통 유대인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높일 수 있는 자랑이 되는 조건들이지만 어리석은 자의 자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어리석은 자로 받으라는 말에 담긴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순히외적 조건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니까 그러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외적 조건을 앞세워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시각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것은 사도만이 아니라 성도 됨에도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말하면서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지칭합니다. 성도라는 존재도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과 선택에 의한 부르심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갖춘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도를 외적 조건을 따져 판단하면서 자신의 성도 됨은 그러한 조건을 초월하여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부르심의 결과로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를 판단하는 시각 그대로 신자 됨을 따져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한 판단에 의해 묻히는 것은 성도 될 수 없는 불의한 자를 성도 되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의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높여야 할 교회 됨이 훼방 되는 심각함이 있는 것입니다.

 

 

3:4-6절에서도 바울은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 앞에는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3:2)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을 이전 성경에서는 손할례당으로 말하는데 손할례당은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할례를 참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로 주장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유대 사상을 지워버리지 못한 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개와 행악하는 자로 지칭합니다. 행악하는 자들은 악한 일꾼, 즉 거짓 사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는 것을 거짓된 것으로 경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3:3)는 말을 하면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할례의 참된 의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했던 고린도 교회도 결국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자신을 우월한 위치로 높여줄 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으로 자기를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나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 항상 자신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그로 인해 타인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욕망이 종교의식에도 담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 헌금. 기도, 봉사, 이러한 것들이 하나같이 자기를 채우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식에 게을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그러한 행위가 있는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아 거룩한 성도 됨을 더럽히는 개와 행악자의 행실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3:7-8절에서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된다면 그 앎은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는 예배드린 행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비우게 하는 참된 예배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은 육체의 조건을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게 되고, 결국 신뢰할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권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가치 있는 육체의 조건이 적은 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부족으로 느끼며 권위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20절에서 말한 것처럼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뺨을 쳐도 용납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을 따라 자랑할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권위로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신뢰할만한 조건이 있다 해도 자신은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우월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조건을 다 갖춘다 해도 그것이 바울을 강한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게 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일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의해 되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 전파를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시고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고전 3:4-7절을 보면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아볼로파 바울파가 있었다는 것은 육신을 신뢰한 결과입니다. 아볼로가 하는 일, 바울이 하는 일을 보면서 사람을 대단하게 우러러보는 시각이 사람을 중심으로 한 분파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결과는 사람이 일한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믿음 안에서 자신을 보잘것없는 연약한 자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연약한 자로 여기고 육체의 신뢰할만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이기 때문에 육체에 속한 얘기를 하는 것은 사실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누가 감히 육신의 것을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 자신도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자신이 고난을 겪은 일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6,27절을 보면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위험한 지역만 골라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 자체가 위험한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바울이 어딜 가든 비록 그 환경이 편안함을 제공한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위험한 곳일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험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위험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험한 교회에서 자신을 사도답게 보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 사도로 대접받는 좋은 환경의 교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목사도 기독교인도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좋은 환경의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목사로, 믿음 좋은 교인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좋은 교회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목사답게 보이기 위해서, 신자는 신자답게 보이기 위해서 육신의 신뢰할만한 것을 갖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신자에게 결코 좋은 환경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이 겪은 고난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을 보면 교회가 자신을 목사로 잘 대접하는 것을 두고 좋은 교회로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성품이나 인격을 높이며 좋은 목사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육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눈에 드러나고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 자체가 예수를 죽인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신자답게 되려고 육신의 것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1:10-13절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 후손과 같은 조건들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인격이나 좋은 성품이 우리를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위험한 존재라면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위험한 조건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거룩한 성도라는 신분인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 이야기에는 도무지 사도에게 기대할만한 능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도와주신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33절의 광주리를 타고 도망쳤다는 내용은 바울에 대해 실망하게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 무능, 부족한 모습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거짓 사도는 복음을 이용해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인 것입니다. 바울을 공격하는 것 역시 자신을 참된 사도로 보이기 위한 자기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 자신은 약한 자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신자를 약한 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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