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19:10

(67강) 사도의 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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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28-33

고후 11:28-33http://onlycross.net/videos/co2/co2-11283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설교>

우리는 어떤 사도보다 바울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 13권이 바울이 쓴 서신이라는 점과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은 일들을 바울이 남긴 업적과 믿음의 강함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에 비해 다른 사도들의 활약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현저히 미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바울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부름을 받는 과정이 바울을 좀 더 특별한 사도로 바라보게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런 바울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32,33)라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자와 같은 자랑이지만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을 한 뒤에 고난을 겪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 일꾼이며 사도답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 고난을 이야기한 것이면 사실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망을 친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바울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으며 복음을 전한 사도에게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쳐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를 만나고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다메섹의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게 되었을 때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놀랍니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고 다메섹에 온 이유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어가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예수를 전하니 놀라고 바울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는 바울의 말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혹했고 결국 바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게 됩니다. 그리고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9:24,25)는 내용처럼 이들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스스로 고린도 교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바울이 사도답지 않다는 또 다른 비난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가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를 피해 몰래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친 것은 사도답지 않은 비굴하고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트집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한 바울 정도라면 도망치기보다 죽더라도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는 것이 사도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쳤다는 것은 믿음 없는 약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고, 사도에게는 감추고 싶은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바울 스스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사도행전 9장의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9장은 바울이 주를 만나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주의 도를 따르는 자를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활동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며 바울을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바울로 변하고 주를 따르는 사도가 된 것은 우리에게는 신비하고 극적이며 특별한 기적과 같은 사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과 함께 사도로 출발했다면 이어지는 것은 위대한 업적과 뛰어난 신앙의 모습만 등장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도 굳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도망치는 약한 모습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내용은 성경에서 삭제해도 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런 내용에 대해 왜 의문을 가지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믿음은 우리가 본받을만한 멋있는 모습으로 증거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 이러한 오해의 시각에서 보면 바울의 자기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성경에 기록될 가치가 없게 여겨지는 내용도 가감 없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어 알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어떤 사도인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 됨을 알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실감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의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공감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 이해되고 믿는 자가 실천해야 할 좋은 교훈의 말씀이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단어를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성문을 지키는 상황이라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바울을 지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강함을 보여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지키심이 이런 방식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나의 강함이고 자기 증명입니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 나의 믿음과 능력의 강함을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과 상관없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확인할 수 있는 체험과 증표를 쫓는 이유도 결국 이러한 종교 욕구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는 사도다운 자기 증명, 자존심, 명예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광주리를 타고 도망치는 이야기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통해서 교회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랑을 해야 한다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이 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그래서 약함은 감추고 강한 것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사도다움도 강함이지 약함이 아닙니다. 목사 역시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목사다움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강한 것에 가치를 두고 있고 자신의 존재 가치도 강한 것에서 찾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부르며 능력을 달라고 하고 믿음이 강한 신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나 성령이 역사하는 증거를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신자의 강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다만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따라서 강함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기독교는 복음과 상관없이 다만 종교단체의 특성만 잔뜩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고후 12:10절을 보면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약함과 강함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내가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까? 대부분이 죄라고 판단되는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신자라면 화가 나는 일에도 참아야 하고, 항상 웃는 얼굴로 좋은 성품을 보여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일은 지켜야 한다는 등등의 수많은 기준이 내면에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나의 믿음이 약하다는 자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강함은 죄를 극복해 내면서 선한 믿음의 행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나름대로 죄를 벗어나 의를 향해 가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능력을 구하고 강함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인식 자체가 이미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사람이 강해지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 또한 자신들이 바울보다 더 강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고린도 교회라는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누가 더 강한가?’라는 육신의 싸움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바울의 약함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의 약함이었던 것입니다.

 

 

고후 13: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을 죽이는 무리를 이길 힘이 없는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 기준에서의 약함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무리를 물리칠 힘과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약하심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주신 것을 그리스도의 약함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약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기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강함은 오직 자기를 살리는 십자가의 능력이었기 때문에 약한 자로 십자가의 강함만 증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도망치는 것을 사도답지 않은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의 강함과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 뜻입니다.

 

 

2:20절의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려주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는 자기 선언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이 믿음이 우리를 약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약한 자로 만들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의 기독교의 환경은 온통 강해져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단지 성경의 기록이 아니라 능력으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믿지 않기에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염려였습니다.

 

 

바울이 23절에서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의 일꾼은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꾼의 범위를 목사, 선교사로 제한하게 되고 일반 교인들은 일꾼을 도우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처럼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증거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자로 약해지고 또 약해지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살게 한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말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나타내는 역할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육신의 조건은 모두 자신의 가치와 높아짐을 추구하는 것들이기에 낮아짐의 역할에 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싸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도 복음도 이런 싸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면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치는 부끄러운 모습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못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을 불러내신 십자가의 능력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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