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6 17:43

(68강) 사도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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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1-6

고후 12:1-6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0106.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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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설교>

사도 중에서 바울처럼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은 과정부터가 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 맞고 옥에 갇히면서 여러 번 죽을뻔하였다는 이야기는 사도로서의 삶 또한 순탄하지 않은 극적인 순간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 즉 낙원으로 이끌려간 본문의 이야기는 더 극적이고 신비한 체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서나도 바울과 같은 체험을 하고 싶다는 부러움을 갖기도 합니다. 물론 고통이 되는 고난은 제외한 신비스러운 체험을 향한 이기적인 부러움일 뿐입니다.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다면나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다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듣는 놀라운 일을 체험한다면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면서 평생 천국만 소망하며 살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생활을 잘하고 싶은 의도로만 바울과 같은 체험을 부러워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없는 체험을 자기 영광과 자랑거리로 삼아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나타내고 싶은 욕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없는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을 내세워서 자신의 사도 됨을 변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면 거짓 사도들의 자랑거리가 바울의 체험에 비해 낮은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육신에 따라 싸우는 싸움으로 말하면서 그러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고후 10:3).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으로 자신을 높이거나 사도다움을 나타내는 조건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이야기를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바울이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후 11:18)고 하면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 같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내용일 뿐입니다. 고난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잡으려는 자를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가 도망친 것 역시 자랑거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난 이야기에는 매를 맞고 있을 때 천사가 내려와 구해줬다거나 죽을 위험에서 하나님이 건져 내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매를 맞았고 옥에 갇혔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누가 이런 고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파로부터하나님이 부르신 사도인데 왜 그런 고난으로부터 건져주지 않으시는가?’라는 공격을 받을 빌미가 될 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재앙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광주리를 타고 도망친 것도 자랑이 되기는커녕 사도로서 비겁하고 부끄럽고 담대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해되기에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하면서 자랑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는 자랑이 들어있지 않은 바울의 자랑에서 과연 신자의 참된 자랑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2절을 보면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은 뒤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3절에서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라는 말이나 4절의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는 말 역시 바울 자신이 아닌 타인이 낙원을 체험한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면서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하고 셋째 하늘 이야기를 합니다. 흔히 이것을 셋째 하늘을 체험한 것을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환상 가운데서 셋째 하늘을 봤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 육신의 몸으로 셋째 하늘에 갔다가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환상 가운데 체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라는 말은 왜 하는 것일까요?‘내가 주의 환상 가운데 체험한 이야기를 하겠다라고 해도 되는데 계시라는 말을 함께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 온 바울의 이야기에서 아쉬운 것이 없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바울이 경험한 셋째 하늘, 즉 낙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합니다. 셋째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셋째 하늘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이야기를 하는 바울의 의도를 아는 것보다 셋째 하늘, 낙원이라는 곳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셋째 하늘 이야기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바울의 이야기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당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반발로 되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반대파라면 오히려 바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공격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나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애당초 자신의 체험을 내세워 자랑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자기 이야기를 믿어줄까 믿지 않을까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6절에서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서 자기가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는 것을 염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말할 것이 있지만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면 본문은 단순히 사도의 신비한 체험 이야기로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도 개인의 체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도의 체험을 통해서 낙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도처럼 장차 낙원에 이끌려 갈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뻔한 교훈적인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은 자기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점을 셋째 하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두고 바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말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즉 자신을 도구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자랑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주의 환상과 계시로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체험이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좀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환상을 꿈을 꾸는 것처럼 무아지경과 같은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광경을 경험하는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한 환상 가운데서 셋째 하늘을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환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2:16-17절을 보면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신 자,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 연관되는 것이 예언, 환상, 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 환상, 꿈을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비한 능력으로 인식합니다. 미래를 보고 미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의 능력이나 셋째 하늘과 같은 환상의 경험, 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의 여부로 성령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단어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의 범위에서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 환상, 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원자로 오시는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 행 2:21절의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는 말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영의 세상의 시각으로 보고 말하는 특별한 자로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이 임한 자에게 해당되는 예언, 환상, 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이 임한 모든 신자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1,2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한 개인의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이 임한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는 특별함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어떤 조건도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자랑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의 취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참된 자랑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육체의 것으로 자신을 높이며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라고 말하는 바울의 진심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된 영광을 생각하면 자신의 약함은 감추어야 할 부끄러움도 자존심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치는 무능한 존재로 보여지는 것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이 임한 존재로 셋째 하늘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알았고 그 세상에 속한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실제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는 체험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낙원을 보고 낙원을 알게 되고 그 낙원이 마음에 박혀 있게 된다면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돈이 없다는 것, 낮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될까요? 그것이 부끄러움과 낙심의 이유가 될까요?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영광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함보다 강함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약함은 세상에서 권력과 힘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졌다 해도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는 것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힘없는 자신을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으로 주의 강함이 증거되기에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몸으로 존재하든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주의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는데 바울의 말은 자신이 하늘로 이끌려 간 것이 실제 몸인지 아니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온 상태로 간 것이 모르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기 몸을 자신이 알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리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바울의 몸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신 이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주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던 강한 바울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주의 뜻입니다. 약한 자로 만들기 위해 바울처럼 살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환경에서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주만 의지하는 약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비밀의 말을 뜻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만 들을 수 있는 비밀의 말이 바로 복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임하여 세상 모두가 듣기를 거부하는 복음을 가히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비밀의 말로 듣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세상이 아닌 다른 새로운 세상에 이끌려 들어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나타내는 도구로 존재합니다. 복을 위한 도구로 부름받은 사람은 세상 것만 추구하는 자신에게서 저주의 흔적을 발견하며 그러한 자신을 새로운 영의 세계로 이끌어 가신 주의 은혜에 눈이 열리고 그 은혜를 높이게 되는 것을 영광과 복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주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붙들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기존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영의 세계를 보게 된 바울의 눈에 세상은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가치 있는 자로 만들어 보겠다고 수고하는 삶들도 우습게 보일 것이고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는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바울에게 하신 일은 바울을 약한 자로 만들어 주의 강함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하신 일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약한 자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의 크신 능력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강함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육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의 강하심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날마다 새로운 영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주의 능력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무엇으로도 자신을 평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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