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7 16:56

(78강) 버림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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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3:5-7

고후 13:5-7http://onlycross.net/videos/co2/co2-13050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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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6.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설교>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구원에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아 잘 살다가 구원되어 천국 가는 것이 믿음의 목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인간이 끝없이 추구하는 복과 구원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해 준다는 다른 복음으로 넘치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의 생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지금의 세상에는 복음인 듯 복음 아닌 말들이 가득합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시 방향을 인간에게 두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다른 복음을 복음으로 오인하여 받아들이고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경 해석의 방향을 인간에게 두었을 때와 하나님께 두었을 때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5절에서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라는 말을 하는데, 이 내용 앞에서 아마 많은 기독교인이 난감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시험하여 확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라는 말을 하지만 어떻게 시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셨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나 현상에 대해서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는 것이고 믿음과 무관한 기준을 가지고 구원의 여부를 따지고 판단하는 오류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특성에 대해 말하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주관해 나갈 때에 나타나는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즐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죄를 즐기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은혜를 배반하고 멸시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죄로부터 단호히 돌아섬으로써,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항상 자신이 죄의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실 때 일어나는 대표적인 특성이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믿음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다는 증거가 더 이상 죄를 즐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라면 죄를 즐기고 있는 것은 믿음이 주관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버림받은 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죄를 즐기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죄를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이 모두 자기를 위한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 즐겁지 않습니까? 자기 사랑이 매일 고통으로 다가오고 그 때문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합니까? 인간은 누구나 죄를 즐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세상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죄를 즐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당연히 죄를 즐거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종교적인 사고에 부합된 복음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초점을 둔 십자가에서 벗어난 말일 뿐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판단과 분별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구원받은 자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안에 계신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에 대해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성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된 것임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약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사라져버린 상태가 신자의 약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은혜만을 생각하고 자기 것이 없는 약함 가운데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도의 부족함을 따지는 것이 곧 믿음 안에서 신자의 약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버림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버림받은 자의 의미에 대해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원 문제를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자기를 시험하여 알고 확증함으로써 버림받은 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만약 자기를 시험하여 버림받은 자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너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62:4-5절을 보면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버림받은 자, 황무지로 부르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그들은 애초에 버림받은 자들이고 황무지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그들을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쁄라(결혼한 여자)로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시는 새 일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버림받은 자, 황무지로 불리는 자들을 헵시바, 쁄라로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의 새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결혼한 여자, 즉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버림받은 자, 황무지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담기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버림받은 자를 신부로 삼으신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죽으신 것으로 확증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버림받은 자라는 인간의 본래 자리에서만 가능합니다.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은총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신자인가 하는 것은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해하는지의 여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자기를 버림받은 자로 여기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것으로 자신을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의 은혜가 담긴 신자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자기 가치에 대한 기대와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만 참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헵시바와 쁄랴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불리는 새 이름인 것처럼, 신자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부여된 새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사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고 사랑의 관계에서 단절된 세상과 같기에 그것을 버림받은 자니라라는 말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라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버림받은 자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도의 사도 됨이 어떻게 증거되는지를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말을 잘하고 몸이 강하고 좋은 것이 사도 됨을 드러내는 조건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은 용서를 품고 있는 그가 사도라는 시각으로 바울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서도 바른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새로운 그것을 받을만한 공로를 세운 것도 없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람됨이나 조건이나 자격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 안에 있는 자가 신자라고 했을 때 믿음에 의해 신자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사실만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이름에 가치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서 불리게 된 신자라는 이름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신자,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이 부여된 자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의 행위를 살피고 그것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멸시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고 하나님의 신부로 부르시는 모든 것은 십자가로 인한 주의 용서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고백이 있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나 행위로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로 악을 행하지 않게 하기를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신자가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악과 선에 대한 생각이 바울이 말하는 악과 선의 의미와 일치하는가입니다.

 

 

7:18-19절에서 바울은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했지만 도리어 원하지 않은 악을 행했다는 것은 인간이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은 인간에게서는 나와질 수 없고 다만 악이 나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선을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자는 선을 행하는 자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우리의 선악 개념이 아니라 십자가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은 십자가로 증거된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용서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악은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것으로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사도를 판단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은 그 행위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의 능력과 피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것이 악을 행하는 악함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비록 사도로 부족하게 보인다 해도 고린도 교회는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의가 이루신 일에 마음을 두고 용서의 능력과 은혜만을 나타내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이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것은 십자가 의로움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행하게 되는 선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하시는 주의 의를 바라보며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버림받은 자리에 있을 뿐이기 때문에 신자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게 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심령에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는 자신의 옳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옳음에만 마음을 두고 예수님만 증거 하고자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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