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7 16:19

(11강) 율법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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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2:15-18

갈 2:15-18http://onlycross.net/videos/gal/gal-021518.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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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이 말이 한편으로는 옳고 또 한편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자기 생각대로 믿거나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을 성경대로 믿을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나를 생각하는 자기중심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인간 됨을 가르치고 있기에 우리가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성경대로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인지한 자로 말씀 앞에 나와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성경대로 믿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우리는 성경의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쉽다는 느낌으로 반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먼저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이쉽다는 느낌으로 반응하기 쉬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바울의 이 말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 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잘 아는 쉬운 내용이다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복음에 있어서 당연한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과 믿음의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상황에 부딪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다소 과격한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교인들의 다툼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대하면서 당시의 복음으로 인한 치열한 싸움의 현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가볍고 안일한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말합니다.‘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모든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유대인은 의인이고 이방인은 죄인이라는 뜻일까요? 바울은 유대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이방인을 죄인으로 바라보는 본래 유대인의 시각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우리가 유대인으로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다 해도 그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율법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와 단절된 믿음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와 단절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와 단절된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적 행위와 단절하고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본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삶의 규범으로 굳건히 자리하여 유대 사회의 질서가 지켜지는 것처럼 이방 세계도 그들의 법이 있어서 질서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단절된 믿음의 길은 율법의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세우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율법주의도 율법을 절대화하여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행위의 여부와 차이를 따라 신앙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절대화하여 의의 기준으로 세우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주장을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상식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는 기독교인으로 인정하고 쉽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육신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간과한 생각일 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사람에게는 없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행위로든 믿음으로든 의로움의 길이 사람에게 있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결단과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인간의 것이 되고 서로가 자기 믿음의 가치를 드러내며 비교하고 경쟁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물고 평준화하는 것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율법의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미련을 두며 육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 하는 것은 자신을 의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의가 없는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이 의로움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의가 없는 자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의가 없는 자로 여기고 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행하심만이 의로움인 것을 알게 하고 주의 의를 믿게 합니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사람을 거룩한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 됨에 인간의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의미를 모르면 이러한 말들이 허황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언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에만 초점을 두면서 인간의 행위를 무시하고 간과해 버리면 결국 사람들은 믿음을 핑계 삼아 제멋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의롭지도 착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려하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믿음의 행위를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행위가 필요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 기독교인의 요구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 기독교인이 율법을 요구하는 것도 믿음만으로 안되고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유대인의 주장을 무조건 복음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치기에는 지금의 기독교가 율법의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처럼 율법 전부를 지켜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십일조와 주일성수, 그리고 절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행위를 기독교인이 지켜야 하는 중요한 신앙의 규범으로 가르치는 것이 그러합니다.

 

 

교회가 이처럼 신앙적인 행위에 중요성을 두는 것은 그것이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성장하는 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만 강조하고 가르치면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고 교인들 또한 교회 생활을 등한시하면서 교회 성장에도 지장이 있게 된다는 우려가 앞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단호하게 다른 복음으로 말합니다.

 

 

17절을 보면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외의 다른 의로움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행실로 의로움을 보이고 그것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결과는 실패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행위는 의로운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만 의로움으로 인정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인 것입니다.

 

 

결국 의로움을 보이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드러나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는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보이고 의로운 자가 되라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것이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고 우리를 지옥 보내기 위해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신 결과가 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3:19-20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는 모든 입을 막아버리고 할 말이 없게 합니다.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 기독교인도 율법이 없이 죄인이라고 하는 이방인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같은 길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같은 길에 있음을 아는 것이 곧 하나 되는 것이고 평화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신자의 좋은 관계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인의 상태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규범으로 세우고 강조하는 십일조, 주일성수 등의 모든 행위도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기에 그것으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 행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지는 않지만, 신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그 증거는 신앙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도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두고 붙들고 있는 유대인의 율법적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라는 인식을 주지 않으려고신앙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해도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증거는 신앙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로 신앙 행위에 의의 가치를 두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아무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 행위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신앙 행위에는 열심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로 이어져 사람의 신앙을 차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은 차별이 아니라 모두가 죄인이라는 보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진 한계이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율법을 주고 가르친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혀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해도 그 행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현실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의 행위의 여부로 인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교회는 이러한 말에 대해 불안감을 느낍니다. 교회 성장에 지장이 된다는 것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교인들 또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없다는 말을 미심쩍어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보다는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더 신빙성을 둡니다. 왜냐하면 죽은 믿음이 아니라면 믿음은 육신의 행함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옳은 성경으로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의로우심만 바라보는 믿음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바울이 신앙의 삶을 믿음과 완전히 단절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어떻든, 육신의 행위가 어떻든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 나타나지는 삶은 있습니다. 다만 그 삶이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에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가령 요즘 현대 사회에 종종 갑질의 문제가 대두되곤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갑질은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룬 나의 것은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돈이 많고 힘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우월하게 보지 않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갑질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헐어버립니다. 하지만 율법은 인간의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바울은 범법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의는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우리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에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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