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4 17:05

(12강) 내가 사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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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2:19-21

갈 2:19-21http://onlycross.net/videos/gal/gal-02192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설교>

현대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일까요? 아니면 율법일까요? 율법을 믿음의 열매, 또는 증거로 여기며 믿음과 하나의 연합된 관계로 이해한다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유대 기독교인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믿음과 율법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율법, 즉 행함을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관계라고 하면서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현대 교회는 믿음이 아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행함과 함께 연합되어 가는 그런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대 기독교인들이 오직 믿음만을 가르치는 바울을 비판하며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율법을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믿음으로 가도록 인도하는 은혜로 여기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만을 강조하고 율법은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그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고 말하면서 자신은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율법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은혜에 대한 인식이 유대인과 다릅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며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굳게 세우기 위해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아마 이러한 유대 기독교인의 주장에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 전부는 아니라 해도 주일과 십일조처럼 율법을 흉내 내며 믿음의 실천으로 여기는 것이 있고, 그 외에도 신자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여러 행함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처럼 지금의 교회 또한 다른 복음을 따르며 행함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율법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 것일까요? 바울은 16절에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혼란스러워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확인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행함이 어떻든 십자가를 믿는 마음으로만 살면 되는가?’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혼란을 느끼며 결국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여겨지는 행함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믿음과 행함을 함께 말하는 것에 더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행함이라는 열매로 증거된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0절에서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실감이 되지 않고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내가 산다면 죄만 행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살게 됨으로써 선을 행하는 믿음의 실천이 있게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진리로 인한 자유를 포기하고 율법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믿음의 실천이라는 행함에 묶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율법의 유혹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과 율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 신앙의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십자가 신앙에서 모호해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삽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로 인한 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육체로 살면서 육체로 인한 유혹을 받으며 죄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신자의 현실이지만 그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육체로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느끼고 실감합니까? 우리는 육체로 사는 가운데 생존을 위해 경쟁하면서 남에게 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타인의 복된 삶을 위해 나의 삶을 양보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움과 분노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타인에게 해가 된다 해도 나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삶의 실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과는 별개로 육신은 항상 죄의 법을 따르고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도 육체 가운데 살면서 그러한 실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2-25)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한 바울이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섬기게 되는 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죄의 법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서는 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도덕적 실천으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연약해서 완전히 죄를 극복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죄의 유혹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가 사시는 신자 됨을 증거 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할 항목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그 안에서 믿음과 구원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되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믿음에서 행함을 분리하지 못하고 유대교처럼 유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실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먼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었고 그리스도가 사신 몸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몸은 바울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 주의 일에 참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증거되는 것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가 내 몸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면 나는 그리스도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가?’라는 의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이고 신자는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 결론으로 강조되는 것은 선한 삶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가 육체 가운데 살면서 경험하고 절감할 수밖에 없는 실상은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의 한계이며 자기 의에 대한 절망입니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얄팍한 행위를 근거로 자신이 믿음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종교나 이단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자기 확신일 뿐입니다. 육체로 살면서 자기 이름과 영광을 삶의 의미와 가치로 삼는 것이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인데도 그러한 자기 실상을 알아채는 영적 시각이 열려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로 살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았고 자기의 몸을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사탄의 도구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이 작용하고 있는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자각하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과 같이 육체로 사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자각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있는 가운데서 육체로 사는 세상을 보게 되면 육체로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소유하던 모든 인간은 사망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행하는 율법의 행위 역시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라는 사실이 거부할 수 없는 빛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말을 단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육체로 살면서 믿음을 실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신앙생활로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를 말하면서도 시선은 항상 자신에게 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행함 안에 살면서 행함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면 구원의 여부로 불안해하는 삶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로 살면서 육체의 일로는 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사망의 몸으로 끝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뻔한 기독교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이 선명한 진리로 드러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새로운 삶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육체 가운데 사는 자신의 참된 현실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 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참된 현실입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 있음을 율법의 행함으로 증거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는 이방인으로 사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19절에서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라는 말의 답이 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이 율법에 대하여 죽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유대 기독교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전혀 다른 방향의 인식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행함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인데 과연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금껏 행함에 대해서는 믿음의 실천, 믿음의 열매, 믿음의 증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행함이 행함에 대하여 죽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은 죄를 알게 합니다. 죄를 알게 되면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실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믿음에 있게 하는 것이 율법의 참된 역할이기에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바울은 그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과 유대 기독교인의 율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때문에 바울은 비난과 비판을 겪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기독교 교리나 신학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육체로 살면서 반드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의 믿음과 육체를 관리하여 믿음의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우리의 육체는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일하시는 현장이 되어 십자가의 생명을 나타내신다는 것이 서로 부딪히는 갈등의 현실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있는 우리에게 바울이 증거 하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로 살아가는 우리의 참된 현실입니다. 비록 세상을 살면서 나타나는 육체의 현실은 믿음에 대해서 너무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인데 그러한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 하는 현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행함으로 자기를 확인할 이유가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실패하고 무능한 우리가 믿음 안에서는 거룩하고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용서의 은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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