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3.30 15:20

(98강) 헛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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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1-3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010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설교>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단체가한국창조과학회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사실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창조과학에 관심을 두고 이들이 말하는 소위 과학적 증거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성경의 내용이 논쟁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도무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홍해 사건 등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의 사실 여부는 하나님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논쟁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논쟁의 경우 거의 사실이다아니다로 나누어집니다. 주로 기독교인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쪽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허구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내에서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기적에 대한 내용들을 상징 또는 신화로 바꾸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중심이면서도 과학으로 증명도 설명도 되지 않는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어떻게 과학과 논리를 동원하여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것도 논리적 시각에서는 도무지 납득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복음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한다는 것은 복음 또한 설명되고 납득되는 문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사도가 증거 하는 복음에도 선포가 있을 뿐 납득하도록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납득시켜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납득할만한 것이 없어서 복음이 아닌 것으로 배척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현실이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은 이해하고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단호하게 선포 되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찾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복음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죽음의 존재에게 베풀어진 십자가가 은혜에 붙들리는 것이 신자라는 기적의 존재는 절대로 설명과 납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부활을 어떻게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과학적인 증명 또한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역사적 증거도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는 후대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은 허구라는 입장을 보입니다. 지금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뉴스로 보도되거나 누군가가 카메라로 촬영하여 보관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의 일이 기록된 성경이 유일합니다. 이러한 부활 이야기를 바울은 왜 끄집어내는 것일까요?

 

 

우리는 은사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바울이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 문제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즉 은사 문제는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까지 주제는 다른 듯하지만 모두 십자가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누구에게 세례 받았는가?’로 발생했던 분파 문제, 상급 문제, 음행 문제, 우상 제물 문제, 은사 문제 이 모든 것들이 각기 다른 문제와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로 증거 되는 신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 사람의 습성으로 행한 결과로 보고 십자가 신앙을 증거 한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믿음의 본질이고 전부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어서 의심 없이 믿는 것을 십자가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깨닫고 새롭게 보게 된 새로운 세계와 질서가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십자가 신앙에 의해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지를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통해서 확인해 온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은 교회가 정작 원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발행했던 모든 문제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닌 자기만 추구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은 교회로서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바울이 주는 확신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신 이유가 영원히 버림받아 비참한 자리에 있어야 할 택한 백성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은 신자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에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신의 버림받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이 우리가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의 현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믿음을 명목으로 복을 얻고자 합니다. 자기 이름을 세우고 싶어 하고 자기 자랑과 함께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버림이 아니라 채움의 욕망으로만 가득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역시 이러한 인간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가치 있고 자랑되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충돌이었고 그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이 믿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것으로 믿음에 버림받은 불신자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3절의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기독교인에게 믿음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진리였고 바울은 이 진리를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을 죄인의 존재로 자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과는 무관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행동과 무관한 선언입니다. 설령 윤리적으로 착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해도 죄인이라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고백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그 믿음은 신자 자신을 죄 가운데 있는 존재로 보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천년 전의 일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었고,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용서의 세계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천년 후에 태어난 우리는 완성된 용서의 세계 안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죄의 존재로 태어나지만 모든 죄가 용서된 세계에서 태어났음을 증거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확실한 구원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에만 마음을 두고 높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당연히 세상적인 가치나 자랑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생각하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딤후 3:8)는 말과 같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의 비천한 모습으로만 양산되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용서를 인간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오해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만 생각하면 마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 받게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가 증거 하는 하나님의 뜻이고 이유라면 차라리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것을 막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따라서 인간이 죄의 존재가 되는 것을 두고 보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단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가 먼저 일까요? 용서가 먼저일까요? 성경을 역사의 시각에서 보면 죄가 먼저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죄가 있고, 그 다음에 죄에 대한 조치로 십자가가 등장하여 용서하신 순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단지 죄를 해결하는 기능적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이 인식하는 것처럼 예수의 피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천국 간다는 기능적 믿음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것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4-5)라는 바울의 복음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라는 용서의 세계를 수립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증거 하는 확실한 구원의 내막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로나 자랑, 가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사랑만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이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하여 납득 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인 것이지 우리의 행함이나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자신이 죄의 존재라는 인식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예수의 피로 인한 용서의 감사와 기쁨을 예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해서 드러나는 신자 됨입니다.

 

 

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큰 소리로 외칠수록 열정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티끌보다 못한 존재로 작아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의해 항상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버림받은 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랑되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헛된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된 믿음을 믿음으로 착각하게 되면 스스로를 믿음이 있는 존재로 인정하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그야말로 헛된 것만 좇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한 경험을 해야 하고, 선행이 있어야 하고, 교회 봉사와 헌신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신이 약속하고 맹세하면서 믿음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믿음에서 버림받은 불신앙의 모습만 있을 뿐입니다.

 

 

고후 13: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의 약함이나 부족함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 니은 것으로 괜찮은 자가 되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높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그가 참된 신자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00강) 보이시고

  3. (99강) 성경대로

  4. (98강) 헛된 믿음

  5. (97강) 교회의 질서

  6. (96강) 화평의 하나님

  7. (95강) 예언의 의미

  8. (94강) 통역의 의미

  9. (93강) 풍성하기를 구하라

  10. (92강) 방언과 예언

  11. (91강) 제일은 사랑

  12. (90강) 온전과 부분

  13. (89강) 사랑은

  14. (88강) 사랑이 없으면

  15. (87강) 다

  16. (86강) 지체의 동질성

  17. (85강) 몸은 하나라

  18. (84강) 몸과 지체

  19. (83강) 여러 가지

  20. (82강) 신령한 것

  21. (81강) 서로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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