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7.27 16:07

(114강)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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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6:1-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01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설교>

바울의 증거대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말하지만 교회로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항상 여러 문제와 갈등의 요소들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세상은 교회에 차등을 두게 됩니다. 소위 교회다운 교회와 교회답지 못한 교회입니다.‘어떤 교회가 더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는가?’라는 시각에서 교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문제와 갈등의 요소가 없거나 적으면 교회답다거나 좋은 교회로 평가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거나, 좋은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실망 하고 다른 좋은 교회를 수소문하여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좋은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으로 신앙의 만족과 보람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교회가 인간에 의해서 파악되고 판단되는 것인데 실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거룩한 성도라는 바울의 증언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8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갈등 요소들은 책망 받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책망 받지 않으려면 문제가 되는 행동들을 고쳐야 합니다. 파벌이 있었다면 서로 하나 되어 파벌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마치 학생들이 서로 싸울 때 선생님이 야단을 쳐서 싸우지 않는 학급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파벌이 없는 교회, 문제가 없는 교회, 서로 사랑하는 교회, 좋은 일을 하는 교회, 이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교회에 있어야 할 중요한 믿음의 요소였다면 바울은 이런 교회됨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서신도 당연히그러한 행동은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것으로 교회를 고치기 위한 책망과 권면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15장까지 살펴본 서신의 내용에는 그러한 바울의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문제 있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잘해라가 아니라너희가 바라보고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것은 주님이 행하시고 주님이 이루실 문제이기 때문에 주를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우리가 책망 받지 않도록 잘하자라고 하는 것은 주가 아닌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나의 믿음을 내가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되기에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게 하는 것이 사탄의 시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은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끝까지 견고히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좋고 나쁨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보는가?’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갑자기 연보에 관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보에 담긴 의미를 모르게 되면 마치 바울이 이야기의 화제를 전환한 것처럼 보게 됩니다. 15장의 부할 이야기와 연보에 대한 것을 다른 문제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물론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성도를 위한 연보에 참여합시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활의 믿음과 연보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활의 믿음은 연보하는 것으로 증명 된다는 왜곡으로 흘러가게 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수시로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에 의해 경계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자기 믿음에 대한 책임감, 자립심, 우월감, 자존심,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임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보를 돈 문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3절의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3)라는 말대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의 연보라 해도 어쨌든 돈 문제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교회를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문제가 있는가 없는가’‘좋은 일을 많이 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여부로 소위 교회의 질을 평가합니다. 이런 시각의 사람들에게 연보는 분명 믿음에 의한 좋은 행함으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어려운 교회를 돕고자 하는 좋은 명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 개인도 이러한 연보에 참여함으로써 믿음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스스로의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보에 대한 생각이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얼마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인데 너무 작은 액수를 하면 자기 믿음의 정도도 그만큼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 해서 많은 액수를 연보하기도 부담스럽습니다. 결국 나름대로 적당한 금액을 절충하여 연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연보가 돈으로 연결되고 돈으로 인식되는 현장이고 현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연보는 돈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돈의 문제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운 형편에 있는데 그들을 돕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연보를 하십시오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연보를 말하는 바울의 취지와 의도가 이것이라면 바울은 분명 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겠다는 것은 연보, 즉 돈이 아니라 은혜로 말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연보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다만 은혜 이야기를 돈 이야기로 알아먹는 자가 있고 은혜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연보를 돈 이야기로 알아먹는다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교회가 돈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복음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라면 연보, 즉 헌금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헌금 강조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라는 불만이 있기 때문에 복음적인 교회는 그러한 교회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여 좋은 교회를 찾고, 소위 복음적인 교회를 찾는 이유에 그런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사랑이라는 기존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16:2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라는 말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에게든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 복음적인 교회를 찾는 이유가 기존의 교회와는 다르다는 기대 속에서 부담 없는 교회 생활과 편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결국 자기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저주 받을 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교회에 시선을 두고 그러한 교회를 추구한다고 해서 본인이 복음적인 사람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보에 대한 바울의 말 한마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연보는 돈을 초월한 다른 이야기, 즉 은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도를 위한 연보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루살렘의 성도는 유대인들이어서 유대인이 아닌 자신들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들과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 해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갈등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하는 것으로도 파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벽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에 대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연보를 은혜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은혜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간관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연보에 대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명한 것 같이 하라고 하는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하라고 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갈 2:10절의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바울은 연보를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성도를 위하는 연보로 말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2)는 말로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을 주일 예배에 헌금 하는 것을 예배의 거룩한 행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 헌금하는 것은 바른 신앙행위로 가르치고 따라서 교회는 헌금을 강조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내용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주일예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일 예배에 헌금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를 말한 것을 생각하고 연보를 모아 바울에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드러난 그대로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돈을 모은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치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성금을 낸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매주 첫날에 모아두라는 것은 사도가 없다 해도 가난한 자를 기억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연보는 돈을 내는 아니라 가난한 자를 기억함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입이 많으면 연보를 많이 하고 적으면 적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수입이 있고 없고의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입이 얼마이든 연보를 얼마 하든 매주 첫날에 연보를 모아 둘 수 있는 것은 수입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것은 수입이 적어서 생활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날의 수입을 허락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는 본질적 사실에 대해 눈을 뜨는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연보는 곧 은혜를 아는 자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위가 되는 것이지 연보 자체가 믿음의 행위로 부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겠다는 것은 삶이 넉넉하고 부요한 고린도 교회의 연보가 가난한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 하는 가난한 교회가 역시 동일하게 은혜로 존재하는 가난한 교회에 은혜를 전달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보를 한다 해도 연보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거나 그 믿음이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연보하는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은혜 덕분에 산다는 고백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연보에 담긴 의미임을 생각하면 현재 교회가 이해하는 연보, 헌금은 결국 저주에 속한 증거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보 또한 연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부활에 대해 길게 말했던 바울이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속한 신자로서 현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연보라는 행위를 동원하여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보를 신앙적인 행위로 생각하고 연보라는 행위로 믿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 또한 주의 일이 아닌 자기 일에 힘쓰는 것이고, 그러한 수고는 결국 헛된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하지 않고 교회가 인정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게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연보는 돈이 아니라 은혜이고, 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고린도 교회에서 온 성도가 가지고 온 돈이 아닌 은혜를 전달받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은혜 안에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통해서 신앙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보람과 뿌듯함을 느끼고 행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믿음을 알지 못한 무지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착각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 참된 현실임을 잊어버리고 내가 나를 책임지려는 잘못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현실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0강) 저주와 은혜

  3. (119강) 서로 문안하라

  4. (118강) 알아주라

  5. (117강) 남자답게

  6. (116강) 복음의 관계

  7. (115강) 바울의 현실

  8. (114강) 연보

  9. (113강) 사망과 승리

  10. (112강) 마지막 나팔

  11. (111강) 혈과 육

  12. (110강) 하늘에 속한 이

  13. (109강) 심고 다시 살고

  14. (108강) 부활의 몸

  15. (107강) 악한 동무

  16. (106강) 부활이 있다면

  17. (105강) 날마다 죽노라

  18. (104강) 사망과 원수

  19. (103강) 첫 열매

  20. (102강) 부활이 없으면

  21. (101강)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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