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8.17 15:50

(117강) 남자답게

조회 수 134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16:13-1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13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설교>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됩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이처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인간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조하게 되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조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동조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일에 동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천국에 들어갈 만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일에 동조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행함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조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주가 행하신 것을 믿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모든 행함을 가치 없는 것으로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만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조하는 신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3,14)는 말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조하는 것이 될까요?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신자 또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동조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도무지 사랑으로 행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말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상식과 생각에 따라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약하지 않고 강하기를 원하신다. 신자가 약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이 말에 동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른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안된다는 약한 믿음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남자답게 강건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믿음에 대한 자기 상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깨어를 기도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남자답게 강건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말도 자기 상식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복음을 알게 되면 바울의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아는데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는 것이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도무지 믿음이 강건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들어왔던 복음의 내용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면 성경은 인간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는 교회에 대해 실망할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는다는 교회에 왜 이런 문제가 있는가?’라는 실망과 함께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다른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 교회에 남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것, 아예 교회 일에 관심두지 않고 내 신앙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주로 이런 반응을 보이며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평온하기를 원하며, 그 평온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왜 그토록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처럼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해서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우리는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이유를 쉽게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서로 사랑하면서 교회를 힘들게 하는 문제가 되는 일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면 문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믿음과 교회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있고 거룩한 성도가 함께 하는 교회의 교회됨을 문제가 없는, 소위 모범적인 교회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단지 맞고 틀린 것을 따져 가면서 틀렸다고 규정되는 쪽을 고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면서 바울의 편지에서는 그런 해결방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다만 문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름대로 복음을 이해하고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성도로 부름 받았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감사가 되고 평강이 되는 것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신자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인간됨에 달라진 것을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예전에는화가 많았는데 지금은 줄었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변화가 있고 믿음에 진전이 있음을 자랑하듯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참고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적게 내는 것을 믿음의 진전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화가 줄었다 해도 어쨌든 여전히 화는 있습니다. 인간의 달라짐은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교인을 모두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 바꾸고, 아무런 문제없이 최고의 선과 사랑을 행하는 교회 되게 함으로써 세상의 본이 되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없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됨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의미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3,14)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우리가 일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에 갈 수 없는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고 일하신다면 천국은 분명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천국으로 인도되어 가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문제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성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함께 하면서 수시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에 실망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의심하고 불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교회와 동일한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신자가 인간성에 있어서 진전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인 인간으로 나아지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전을 이루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문제가 있게 되면 자신을 보게 되면서 자신으로 인한 불안과 염려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두고 말했던 것을 다시 보십시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바울이 교회를 바라봤다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드러난 문제들을 본다면 도무지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부르시고 하나님이 이들에게 일하고 계시는 현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교회가 문제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은혜와 평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 분파가 있고, 음행과 우상 제물, 은사 문제 등으로 해서 의견이 충돌하며 서로 자기의 우월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 위해서는 그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지 않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아버지가 예수님으로 더불어 하시는 일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고 교회가 평온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주변에 조성되는 현실과 상태를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해 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항상 갈등이 있고 불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과 불안이 해소되는 것을 교회답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갈등과 불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성도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과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됨을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훼방하는 세상에서 어떤 현실에서든 그리스도가 주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보라는 것이 바울의 취지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것은 힘을 내어서 강건한 신앙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실패가 있고 도무지 믿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일하시는 보이지 않는 그 현실을 굳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내가 왜 이럴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도 사랑을 보이거나 어떤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간성을 보지 않으십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일하십니다. 때문에 비록 우리에게서 죄의 모습이 드러난다 해도 분명한 것은 여전히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은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시고 거룩한 성도되게 하신 사랑만 생각하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아 거룩한 성도된 고린도 교회가 분파가 있다는 이유로, 음행의 문제가 있고, 우상 제물 문제 등으로 다툼이 있다는 이유로 성도라는 신분이 취소되는 일이 있을까요?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은 개선될 자질도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를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것이라고 염려한다면 그 또한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죄에 대해 무감각하든 민감하든 우리 힘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죄를 극복하거나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에 대해 민감하다면 죄에 붙들려 끌려가는 무능한 자기 현실을 더 생생히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 되었다는 것은 이미 천국의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성도이고 천국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이 신자로 하여금 마음 놓고 죄 짓게 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우리가 마음 아파하면서 죄를 지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평소에도 마음 놓고 즐겁게 죄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때문에 죄에 대해 둔해진다거나 마음대로 죄를 지을 것이라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시고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좋은 인간성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나 자신에게나 서로에게 그러한 기준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보다 뛰어나거나 수준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짜 문제는 믿음에 진전이 있어야 하고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2. (120강) 저주와 은혜

  3. (119강) 서로 문안하라

  4. (118강) 알아주라

  5. (117강) 남자답게

  6. (116강) 복음의 관계

  7. (115강) 바울의 현실

  8. (114강) 연보

  9. (113강) 사망과 승리

  10. (112강) 마지막 나팔

  11. (111강) 혈과 육

  12. (110강) 하늘에 속한 이

  13. (109강) 심고 다시 살고

  14. (108강) 부활의 몸

  15. (107강) 악한 동무

  16. (106강) 부활이 있다면

  17. (105강) 날마다 죽노라

  18. (104강) 사망과 원수

  19. (103강) 첫 열매

  20. (102강) 부활이 없으면

  21. (101강) 하나님의 은혜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