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2.23 15:34

(93강) 풍성하기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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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6-12http://onlycross.net/videos/co1/co1-140612.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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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설교>

방언에 대한 사도바울의 입장은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2)는 말이나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6)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5)라는 말을 보면 바울이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방언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방언을 해도 되는지 하면 안되는지가 논점이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문제에 관심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가 믿음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방언을 하고 안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을 보면 방언이나 병 고침과 같은 체험적인 것에 심히 치우쳐 있습니다. 체험적인 것을 믿음과 성령 받음의 증거로 채택하면서 방언과 병 고침 같은 은사가 믿음과 성령 받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해 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체험적인 은사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방언과 병 고침 자체를 부정하면서 결국 체험적 신앙을 중요시 하는 자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 또한 복음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체험적 신앙을 부정하고 멀리 하는 것으로 신앙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것 또한 자기 긍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긍정으로 드러나는 것은 복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복음의 평가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의미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까요? 바울은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에 유익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기체험에 그치는 것이 전부인 방언의 한계 때문입니다. 즉 자기체험은 자기 신앙을 긍정하는 것으로 나아갈 뿐이지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방언을 유익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직접적인 체험을 원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체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이 성령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을 확인함으로써 천국이라는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체험을 원하는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은 뭔가 불안감과 함께 시기가 있게 됩니다. 저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는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처는 방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부정함으로써 방언 하지 못하는 것이 신앙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 또한 방언이라는 체험이 없는 자신을 방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에도 교회의 문제에도 그 중심에 자신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익 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에게로 이끌어 가시고 아들에게 붙들린 자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체험에 진리를 알게 하는 효과가 있을까요? 바꾸어 말하면 방언을 하면 진리를 알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방언의 체험에 그런 효과가 있다면 바울은 방언을 적극 권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은사의 체험도 진리를 알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체험을 할수록 체험이 신앙이 되면서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구원 받지 못한 것이다는 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가 동일한 존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존재라는 것은 저주 받은 죽음의 존재를 뜻합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달라지지 않고 차별되지 않습니다. 어떤 은사를 받고 어떤 체험이 있다 해도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이 분명히 증거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말하지도 않고 말한다 해도 듣기를 싫어합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러운 내용이고 또한 불필요한 말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성도가 동일한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그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사람들은 그 관계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행동과 말과 성격 등등의 여러 부분으로 마치 믿음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분류하여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모습들이 교회의 동질성이 아닌 차별성에 부합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면 마치 진리가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를 말한다 하나 진리처럼 보이면 된다고만 생각하는지 그 내용은 진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온갖 쓰레기로 채워져 역한 냄새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죽음의 존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한 모든 내막이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십자가를 말한다고는 하나 이 모든 내용이 상실된 채 마치 수레에 인간이 원하는 복을 가득 싣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소위 신앙생활에 열심인 사람을 찾아다니며 복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 역할을 해주는 예수가 인기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현대 교회에 필요한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유익한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제가 내리는 결론은 복음입니다. 교회에 필요하고 덕을 세우고 유익한 말, 여러분이 듣기 싫다 해도 들려져야 하는 말은 분명 복음뿐입니다.

 

 

뻔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복음의 말을 현대 교회에서는 듣기 힘들게 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는 복음의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방언은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이 주어집니다. 말씀이 주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말씀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구원이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순종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가는 역할을 말씀이 하는 것이지 방언과 같은 은사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통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만났다면 서로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은 내가 피 흘려 죽은 이 상황이 바로 너희 상황이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받은 신자에게서는 무엇이 나올까요? 당연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 받을 저주의 존재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이 예수님과의 교통이며 만남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게 됩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은사 받은 자이기 때문에 특정한 은사 체험 하나로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은사를 모르는 것이며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 영적인 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도 바울은 은사의 풍성함을 개인적 신앙이 자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으로 연결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은사를 초월적 체험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고 아님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은사 문제는 교회의 덕보다는 자기의 덕에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 은사의 약점이며 방언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은사 자체가 지닌 약점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이 은사로 인해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은사는 개인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방언을 하거나 다른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 믿음이 있다거나 구원 받았다는 확고한 증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믿음이 없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8절에 보면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말합니다.

 

 

피리든 거문고든 나팔이든 자기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 소리를 명확하게 내는 것으로 어떤 소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처럼 교회이기 때문에 내어야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소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방언과 같은 체험이나, 여기에 덧붙여서 윤리 도덕적인 실천과 사업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라면 교회의 특징은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구원 받은 사실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여기에 개인 신앙체험은 끼어들 가치가 없습니다. 방언을 하건 병을 거치건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도 유익이 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방언과 예언과 통역의 특징은 인간이 의도하여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하게 되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과 통역과 예언이 하나 되어 증거 되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이 소리를 분명하게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2: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말에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말을 잘해서 사람을 설득하고 그것으로 능력 있는 사도임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말합니다. 그것이 바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분명한 소리였고 그 소리가 교회를 유익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것이 풍성해야 합니다. 즉 복음의 소리로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로 풍성해지기를 구한다면 개인 신앙을 보여주고 나타내는 것에는 점차 관심이 멀어질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영적인 복음의 소리가 자신을 그리스도로 풍성하게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교회를 풍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풍성해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풍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체험이 풍성하고 도덕과 윤리로 풍성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동원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영적인 것을 사모한다면 무엇으로 풍성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은 항상 나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이 풍성해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풍성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것으로 자기를 자랑합니다. 성령으로 인한 방언도 마치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라 이름 하나 교회 아님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교회됨은 십자가만 증거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제 아무리 다른 것으로 풍성해지고 풍성함을 자랑한다 해도 십자가가 빠진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럼에도 거짓된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얄팍한 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성령으로 인해 깨어지고 드러나게 되면 나로 인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가 보인다는 것이 복음이며 진리입니다.

 

 

자기 신앙생활이나 실천으로 풍성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실천과 체험과 도덕으로 풍성해진다 해도 그것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교회의 풍성이 아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풍성해지기를 구하십시오. 교회의 덕은 복음으로만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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