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4.13 15:12

(100강) 보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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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설교>

기독교의 전통적 부활신앙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를 믿으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문자적인 생각이고 오해와 오류로 뭉쳐진 잘못된 부활관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는 부활이 말하는 참된 의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보이신 것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슬픔과 실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보이신 것일까요? 그런 이유라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이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을 죽인 빌라도와 제사장, 바리새인, 그리고 유대인들 모두에게도 보이셨으면 자신들이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부활을 믿기보다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등의 말로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고 덮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늘로 가시지 않고 세상에 계속 남아서 복음을 전하신다면 부활하기 전보다는 다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서 여전히 말씀을 가르친다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주는 의미보다 가시적인 효과에 중점을 둔 생각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좀 더 믿음이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면 믿음에 더 확신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는 신앙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라도 예수님이든 천사든 만나기를 기대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 신앙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고 싶은 헛된 생각일 뿐입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이런 헛된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고 할 때 사람들은 부활하신 몸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신자가 부활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사람에게는 동일한 것 같습니다. 35절의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는 말처럼 고린도 교회에도 같은 물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에 대해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대개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몸의 의미를 육신과 다른 신비한 몸으로 이해합니다. 육의 몸을 육신, 신령한 몸을 죽은 후에 부활한 새로운 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몸은 육신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요 20:19절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유대인들로부터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신 예수님이 가운데 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문을 열어 주었다는 내용이 없는 것을 보니 문이 닫힌 상태인데도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이 생략되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벽을 통과해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몸을 벽도 마음대로 통과해서 다닐 수 있는 신비의 몸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눅 24장에 보면 제자 중 둘이 길을 가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동행하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이유로 부활의 몸은 육신과 달리 광채가 나기 때문에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눅 24:39절의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는 말씀을 보면서 부활의 몸도 살과 뼈가 있다고 하고, 예수님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신 것 때문에 부활의 몸도 먹고 마실 수 있는 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부활이 무엇인가?’라는 것보다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나중에 자신이 부활했을 때 가질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전히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의 효과를 누리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욕망일 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이 말씀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시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십자가라는 노선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말씀에 의해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신자 또한 말씀에 의해 존재하고 말씀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중심으로 했을 때 사람은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먼저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루시는 현실로 보면서 말씀이 이끄시고 이루시고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와는 다르게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씀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무엇이 성경대로 사는 것인지는 아실 것입니다.

 

 

성경대로 다시 사신 예수님이 열 두 제자와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 역시 사람이 둘로 나눠지는 계기가 됩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격자와 비목격자의 구분이 아닙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경험이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 만난 경험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면 이 경험을 기준으로 높고 낮음이 형성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맨 먼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만큼 자기 우월을 주장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성경에 대해 들은 두 사람의 제자 역시 자신들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부각하려고 할 것입니다.‘너희들은 하지 않은 경험을 나는 했으니까 내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불리한 입장이 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고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맨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것도 부활하셨을 때가 아니라 하늘로 가신 후에 하늘에서 비치는 빛과 함께 음성으로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이끌려 가는 신앙의 길에 자기 가치를 챙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말씀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말씀에 이끌려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말씀이 일하신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예수를 보게 된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결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었고,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닫고 숨죽이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는 증거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확인시켜 주고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예수님을 따르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실 분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홀로 남겨질 상황에서 그들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신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죽음이 없는,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세계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생명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초라해지게 됩니다. 세상의 무엇도 죽음을 이긴 생명과 견줄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은 성경대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로 이끄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단순히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이 아니라 말씀이 나 같은 자를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든 것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되어진 일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다면 죽음의 몸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한다 해도 결국 죽음의 존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실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8: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분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이기에 결국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은 초라한 존재로만 나와질 뿐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만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고, 그러한 경험으로 자기 신앙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직접 목격했는데 변화되는 것이 없겠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빛을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자신에게만 들리는 특별하고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인데 바울을 회개하게 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사도로 변화하게 한 것이 경험이었을까요?

 

 

9:1-2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주를 만나기 전 사울에게 주의 제자들은 예수를 섬기던 남은 잔당이었을 뿐입니다. 예수가 죽고 없기 때문에 그 잔당들만 처리하면 예수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주여 누구시니이까라는 물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답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은 예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가장 먼저 전파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린 것으로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죽임을 받아 당연한 존재였고, 예수를 추종했던 모든 제자들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고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는 것이 생생한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면 바울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위한다는 바울의 모든 신앙체계와 가치가 무너지고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놀라운 사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가 자기 경험과 감정에 치우치고 그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다시 사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가치 없는 것으로 무너지는 경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 경험과 감정적인 것으로 자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 세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이 자신을 보이신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붙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 자리는 예수를 믿고 따랐던 모든 것이 위선과 거짓으로 드러나는 현장이 될 뿐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것까지 위선이며 슬퍼할 자격도 없는 인간으로 폭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신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가 자랑하듯 내세우는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것도 예수님의 부활이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일에 도움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은 오직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을 뿐입니다.

 

 

무엇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일하신다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면 됩니다. 그 현실에서내가 일한다가 부인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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