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4 15:32

(1강) 은혜와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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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2

고후 1: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01010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설교>

바울이 자신을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사도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구의 표면적 의미만 본다면 이것은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는 말에서 복음을 위해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의 의미,‘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은 천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의미를 모르고 복음을 말하고, 죄인의 의미를 모르고 죄인을 말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를 말하는 모든 것이 허망한 말의 향연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개인적 문제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뜻, 나의 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존재나 자기 당의 정당성을 위해국민의 뜻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남발하는 것처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멋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로 향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로 향해 있다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의 사도된 바울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향해 있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로도 나누어져 향하는 것이 아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면 자기를 향한 자신의 뜻은 포기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면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또한 포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자기 뜻을 위해 사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앞에서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무능과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고 말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에게도 자기의 뜻이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하나님을 믿는 방식 그대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7:52-53절을 보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이 말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었고 그에 대한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그리고 이 분노에 앞장 서서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 바울이란 이름을 갖기 전의 사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울을 포함하여 모든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그 또한 지키지 않은 것이었음에 대한 폭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스데반의 죽음이 없이 사울을 만나셨다면 어땠을까요? 스데반이 사울의 손에 죽임을 당할 때 나타나셔서 스데반을 살리시고 사울도 만나셔서 주를 믿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다면 복음의 일에 있어서 더 이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시각과 뜻에서 계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인간이 인간 방식의 구원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인간 방식의 구원에 집착한 자들의 분노와 포악의 결과입니다. 인간 방식의 구원은 자신들의 것, 즉 자신들의 선함과 열심과 행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한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모든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 선 전적이 있습니다. 그 역시 인간의 방식의 구원에 집착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한 구원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인간 방식은 곧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부인되고 거짓된 신앙으로 드러나는 것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신 것이 인간방식의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인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되었음을 말하는 깊은 의미는 인간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위한 사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높임 받을 가치가 있는 영광의 존재가 아님을 바울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비록 사도 바울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순종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가르치기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든 성도든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사도도 성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며 저주의 사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누구든 인간의 가치와 영광에 뜻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거짓 사도, 거짓 성도로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2)고 말하는 것도 단지 은혜와 평강이라는 덕담을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은혜와 평강을 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삶에 힘든 문제가 없고 평안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삶이 힘들고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편안하지 못하면 은혜와 평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또한 인간의 자기를 위한 자기중심적 해석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그런 것이면 스데반은 은혜와 평강이 없는 인생이었고,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로 간 사도 역시 은혜와 평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사도직에 대한 의심까지 받은 바울의 상황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해석은 온통 모순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고 상상하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강이 무엇인가를 알고도 원하신다면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성도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라면 일단은 우리가 추구하는 육신의 평안함이나 정신적인 안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 흘림은 메시아로서의 영광이 짓밟히고 묵살된 생생한 고난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은 십자가의 고난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은 인간 방식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 집착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 방식의 구원에는 인간의 가치와, 영광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의 구원에는 인간의 가치와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치와 영광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십자가 방식의 구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간 방식의 구원을 선호하면서 인간을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하는 복음에 대해서도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성도 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 인간이 추구하는 은혜와 평강을 밀쳐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성도인가 하는 것은 주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알고 있고 추구하던 기존의 인간적 은혜와 평강이 거짓된 것으로 분별되는 경험이 있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인간 방식의 구원을 추구하고 고집하는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고난의 자리에 있기를 원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 받은 성도가 인도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붙들리게 하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은 불확실한 것을 인간의 마음에 들게 조립하여 마치 확실한 것처럼 간주하여 소망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때문에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 관계에서도 인간마다 각기 다른 은혜와 평강이 됩니다. 삶의 형편과 감정의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도가 말한 은혜와 평강을 여전히 인간적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에서 우리가 원하는 현실이 형통과 평안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서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환난 중에 있는 성도를 환난의 상황에서 건져 주심으로 은혜와 평강에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로하시는 분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바울의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게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은혜와 평강을 원합니까?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자기 소유가 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에 담긴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원하는 은혜와 평강의 쓸모없는 실상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방식만이 구원이 됨을 알게 되는 것이 곧 평강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면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스데반처럼 죽는다 해도 생명에 속한 자라는 상태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있는 것이고, 은혜 있음이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있는 신자에게 세상일은 염려와 걱정거리로 박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와 걱정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자각하면서 십자가의 피의 은혜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믿음으로만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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