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7 15:29

(25강) 잠깐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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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4:16-18

고후 4:16-18http://onlycross.net/videos/co2/co2-04161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설교>

인간의 마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경험하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행복이 지속되지 못하고 잠깐의 감정으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도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빛을 잃고 더 이상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방 권태를 느끼고 또 다른 새것을 찾게 됩니다. 때문에 인간이 원하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허무와 상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깊은 함정입니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랑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틸틸과 미틸이라는 남매가 꿈속에서 병든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마법사 할멈의 부탁을 받고 요정과 함께 상상의 나라,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 추억의 나라 등을 찾아 밤새 헤매지만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꿈에서 깨었는데 머리맡의 새장 속에 파랑새가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 교훈을 담은 동화입니다. 이 동화로 인해서 파랑새가 희망과 행복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동화 이야기처럼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부러워하지만 말고 지금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지금 자신에게 있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질과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 해도 잠시 동안의 자기 최면, 마인드 컨트롤에 지나지 않습니다.‘나는 행복하다라고 수없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운다 해도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발버둥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으라는 것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희망과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쫓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는 이유도 자기 행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신에게 희망과 행복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에서 듣는 말 역시 당연히 희망적이어야 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을 위한 교회와 설교를 찾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오히려 헛되지 않기 위해 예수를 찾는 현실에서 확인되는 것은 복음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갇힌 우리에게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런 말이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믿음이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고 수긍된다 해도 현재의 삶에서는 절실하게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말씀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고 있을까요? 보이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은 평소의 삶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한순간도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온통 보이는 것을 주목하고 보이는 것에 온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영광, 천국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을 주목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 해도 잠시 후면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보이는 것은 결국 허무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이 보이는 것에 대한 보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인간의 집착이 다른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생의 가치와 완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기를 바랍니다. 목사로 설교하는 제 인생의 가치와 완성이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주께 있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가치와 완성 또한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인 우리가 보배를 가졌고 보배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그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바울이 보이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도로서의 자기 가치를 높이거나 인정받는 일에도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로서의 자존심, 자기 과시, 이런 것에 주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교회가 바울의 외적 조건이나 추천서 등의 문제로 시비를 거는 것은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 인간의 행태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1:10-11절을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세상인데 멸망하고 낡아진다고 합니다. 영원한 보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의 어떤 내용에도 보이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주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고 비난을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닌 보이는 사람에게 주목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고린도 교회의 행태는 지금의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행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더 절실함을 가지고 있고 보이는 것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 되고 정확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의 말을 따라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주목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믿음이 역사함으로 만들어 내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세상이 말하는 조건과 상관없이 이미 기적에 속한 자로 존재한다는 것이 바울이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교회에서 활동하는 어떤 것으로도 자기 믿음을 확인하거나 과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활동의 정도나 빈도에 따라 자랑을 하거나 자기 신앙에 대해 낙심하는 것이 있다면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참으로 헛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보이는 것에 주목하게 하고 자신의 선한 행실과 바른 신앙생활로 믿음을 채우도록 독려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폐해입니다.

 

 

16절을 보면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합니다.

 

 

겉사람은 아담에게 속한 죽음의 형상이고 속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의 형상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고 말합니다.

 

 

겉사람도 속사람도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속사람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됩니다. 겉사람은 여전히 낡아지면서 우리가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합니다. 죽음의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부활의 형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고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잠깐이라는 말이 실감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기쁘고 슬펐던 일들이 있을 것이고,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행복의 감정이든 불행의 감정이든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의 평안도 건강도 젊음도보이는 것은 잠깐이요라는 말에 해당될 뿐입니다.

 

 

바울은 지금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소유 정도와 인간적 조건은 다르지만 동일한 것은 흙에 속한 겉사람은 죽음의 형상으로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주목한다면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을 평가하며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헛되고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말에 담긴 의도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예배당이 폐쇄되고 정상적인 예배 모임을 갖지 못하게 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부활 생명은 흔들림 없이 영원합니다. 예배당에 모이지를 못한다 해도 하나님이 성도로 부르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형상으로 존재합니다. 죽음의 형상으로 존재했던 우리를 생명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찬송하기 위해 모여서 예배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주일을 지켰다고 과시하고 자랑할 수 없음을 코로나19 사태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모든 일상에서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2)는 이사야의 말처럼 자신의 가치 없음을 경험하는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의 가치 향상을 위해 힘쓰는 일상만 반복되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의 생명에 대한 간절함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목한 바울에게는 환난도 무겁고 심각한 일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가벼운 고난이었습니다. 환난 자체가 가볍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일은 육신의 시각에서 본다면 고통이 되는 무거운 환난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환난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환난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영원한 영광의 존귀한 것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라면 어떤 환난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는 크고 영원한 영광의 존귀한 것에 비하면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현대 교회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전파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를 교회라 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잠시 받는 환난을 동원하시고 겉사람의 낡아짐을 실감하게 합니다. 우리가 꿈꾸고 항상 주목하며 살았던 보이는 것들을 무너뜨리시면서 보이는 것의 잠깐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하심을 보이는 것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기에라는 의문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과 염려만 가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일하시는 내막을 알게 되면 비록 오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주어진다 해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평안했던 날을 당연한 듯 살면서 겉사람의 낡아짐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주어진 어려움으로 육신의 낡아짐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몸에 속한 새로운 영광의 몸에 주목하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기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행은 무엇일까요? 환난을 당하는 바울을 불행하다 할 수 있을까요? 겉사람의 가치와 소유로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는 세상의 시각과 기준에서는 바울을 불행하다 하겠지만 바울 본인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속에 자리하고 있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생명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에 대해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불행은 몸을 낡아지는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몸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이 즐거움과 기쁨이 됨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야기해줘야 할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동일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교인들을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끌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자의 미래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그래서 몸의 낡아짐으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에 속한 몸에 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몸과 상관없이 부활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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