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4 16:30

(17강) 율법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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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10-12

갈 3:10-12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101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설교>

유대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율법의 행위의 만남에서 의가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말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은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함께 할 수 없는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과 율법의 행위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령께 속하여 성령으로만 가능한 영의 일인 것에 비하여 율법의 행위는 육체에 속하여 인간의 열심으로 되는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영과 육은 함께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과 율법의 행위가 협력하여 함께 가는 것이 맞는다면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믿음이 인정받을 수 있고 따라서 행위가 구원의 확실성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어떤 인간도 육체로는 율법의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율법의 행위가 함께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믿음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참된 현상은 육체로 인한 자기 의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어떤 행위도 의가 될 가치가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십자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아래 있는 육체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며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의가 됨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믿음이 역사하는 현장입니다.

 

 

믿음은 의를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게 합니다. 의를 행하여 신자의 자격과 가치를 나타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포기함으로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대신 저주받은 예수님의 행하심만 의로움으로 자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만 의지하게 하는 것으로 참된 신자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신자 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증거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과 육체를 오해합니다. 믿음을 육체의 일과 연결하여 자기의 의지와 결단으로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로 받아들입니다. 육체로부터도 믿음의 행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체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몸으로만 간주합니다.

 

 

5:19-21절의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이 그러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일에 하나님이 선한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고 율법의 행위가 믿음과 연결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을 알고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육체와 무관하게 성령이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는 일은 하나님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도우시고 선한 행함에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이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이지만 모두가 자기 위주의 생각에 의한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십자가에 대한 바른 생각입니다. 십자가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로 만족하고 감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는 사건으로 믿는 믿음의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항상 인간 위주로 인간에게 유익 되는 것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돕는 인간을 위한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령이 없는 믿음은 자기 육체를 위한 종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보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거듭해서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제자들도 베드로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말과 결심은 분명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주를 부인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것을 감추고 거짓된 위선의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선한 결심으로 주와 함께 죽는다고 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주를 부인하는 행위가 있기도 전에 그들의 선한 의도를 거부하십니다.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인간의 선한 의도와 결심으로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누구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믿음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참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행위에 미련을 둡니다.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사람을 판단하는 것 또한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차질을 준다는 염려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안다고 하면서도 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이런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마치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구원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염려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선하든 악하든 행위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살면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가 되는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서는 죄가 되지 않는 행동이 나올 수가 없음을 자각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거나 악한 행위가 방해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예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구원은 차질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율법의 행위를 거부하고 차단한다는 것은 인간을 저주의 존재로 바라보는 복음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전혀 흐릿함이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이 원칙이 유지되고 있는 그들이 성령 받은 거듭난 신자입니다. 이처럼 신자 됨의 증거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일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율법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한 것으로 간주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내용만으로도 명확히 정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는 율법의 행위가 있든 없든 많든 적든 저주 아래에 있는 자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1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시고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심지어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지켰다고 반응한 것을 보면 평소에 이웃을 도우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라는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돌아가게 됩니다. 이유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았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청년에게 율법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우월한 자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을 묻는 것도 인간을 애초에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 나올 때부터 자신을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청년에게 영생은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한 일을 행하여 얻는 것이었기에 예수님과 상관없는 존재로 저주 아래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심각성이 청년의 이야기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행위로 믿음의 의를 보이겠다는 것 자체가 예수에게서 돌아서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위가 믿음의 의로움으로 인정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환영받을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의 착각과 도무지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기독교인에게당신은 율법 행위에 속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아니오라고 답할 것입니다. 율법을 구약의 유대인의 율법으로 생각하고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이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인데도 그러한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 행위에 속했다는 것은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행위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판단하기에 죄를 지적받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선한 믿음의 행위로 강조하는 것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안에서 죄를 지적받고 책망받으며 자신을 구원될 자격이 없는 저주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히려 믿음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타인보다 우월한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한 자신을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간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율법 행위에 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행위가 없는 타인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저주받은 자라는 자리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위의 문제에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행위가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는 그 행위를 토대로 자신의 믿음을 판단할 위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누구도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비록 성경을 잘 알고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해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생활로 인해 고민과 염려를 많이 합니다. 그런 고민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구원은 믿음으로만 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행위를 고집하는 것이 우리이기에 우리가 부자 청년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롬 2:13절에서는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율법을 행하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율법의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니까 율법을 행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힘쓰라는 뜻일까요? 누구든 그러한 해석을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탄의 무리이며 이단입니다. 바울의 말은 믿음의 문제에서 율법의 행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하여 율법으로 살게 된 자는 아담 안에서는 아무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어느 것은 지킬 수 있고 어느 것은 지킬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를 지킬 수 있다면 나머지 모두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일정 시간 동안 육체의 일을 쉬면 된다고 생각하는 유치한 안식일입니다. 참된 안식일은 완전한 쉼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육체는 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 하는 탐욕은 쉬지 않고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율법이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율법의 행위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의롭게 되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행위가 자신의 선함과 믿음을 증거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도 십자가도 믿는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믿음은 그저 흉내를 내는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8:10절에서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몸은 죄로 인해 죽었습니다. 죽은 몸에서 선하고 의로운 행함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부활하신 주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가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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