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2 18:22

(6강) 택정과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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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1:15-17

갈 1:15-17http://onlycross.net/videos/gal/gal-01151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설교>

바울은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였다고 말합니다(4). 우리는 이러한 말을 쉽게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대속하시고 악한 세대에서 건지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 바울의 말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받은 자답게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은 전혀 그러한 의도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라는 말도 확고한 구원을 말해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택정과 은혜라는 용어를 마치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택정 받지 못한 사람은 억울하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이 택정하신 사람만 구원하시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쓴 바울의 의도는 관심 두지 않고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해석은 성경적으로 한다 해도 바울의 복음은 알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택정이라는 말을 성경에 맞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있다 해도 택정을 믿는 믿음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는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의 의도를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악한 세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심으로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은 악한 세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께서 건져 주시는 것 말고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예수님이 우리를 건지셨다가 아니라예수님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을 수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예수님이 아니면라는 말은 우리가 신앙의 실천과 행위로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말에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함도 구원의 문제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고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는 것도 인간의 행함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택정과 은혜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바울은 13,14절에서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아닌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기까지 했다면 도무지 사도 될 수 없는 결격 사유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는 일을 하기 전에 이미 바울을 택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어서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헌신과 열심이 있었다 해도 역시 그것과 무관하게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그것이 바울의 구원이나 사도 됨을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되는 것은 바울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자 되는 것 또한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택정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함을 믿음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전에 교회를 핍박했던 것을 이유로 사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택정과 은혜로 부르심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지 않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사도 됨에 대해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실상을 생각하지 않거나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들 또한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았고, 따라서 사도 됨이나 신자 됨에 있어서 자랑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복음의 시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정하신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조차 없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로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의 실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조차 없는 무능한 존재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은 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신 십자가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함께 언급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이 용납하는 행함은 대속을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행함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그리스도의 행함을 바라보게 하고 높이고 자랑하는 것으로 증거되기에 자연히 인간의 행함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택정하시고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겠다는 것도 우리의 발상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을 택정하시고 사도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는 행위를 두고 보시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을 부르신 것이 바울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이전 행위를 반성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예수를 믿고자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집하는 것은 유대교였습니다. 기독교는 진멸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바울이 사도가 되고 수많은 고난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외부의 강력한 능력이 개입한 결과라는 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택정과 은혜라는 용어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주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바울을 택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울에게 성취된 결과라는 시각으로 바울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에게 시선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의 문제에서도 믿음의 증거가 나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자신이 알 수 있고 감각 할 수 있는 것으로 찾습니다. 자신에게 나타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통해서하나님이 나를 신자로 부르셨구나’‘내가 믿음을 받은 자구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증거로 생각되는 자기 경험을 포기하지 못하고 신자 됨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16절에 보면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것을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자기 속에 나타내신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더 확실하고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바울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행 9:3-5절에서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말하는 이것을 바울이 예수를 믿고 사도로 시작하게 된 획기적인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면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셨다는 모호한 말보다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속에 나타내셨다면 누가 그것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다메섹 경험을 사도 됨의 증거물로 내세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정당하게 부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의도는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5-7)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어둠입니다. 빛이 비쳐도 빛으로 알아볼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춘다 해도 어둠의 마음으로는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둠의 마음에 주가 오셔서 우리가 어둠인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어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빛을 빛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을 어둠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경험이 바울을 사도 되게 한 것이면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다메섹 경험을 사도로서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의 원수로 행하며 죄인 중의 괴수로 불리는 것이 마땅한 바울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 바울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 됨은 죄 가운데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 같이 세상이 인정하는 선한 행실로 신자 됨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서로 부추기면서 보이는 것에 속는 길로 가는 것이 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울 또한 이전의 행적으로 판단하며 사도 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말을 아들을 나타내심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바울의 속에서 아들이 일하심으로 마음이 바뀌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를 믿게 된 것도 우리 속에 나타내신 아들이 일하심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된 결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게 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구원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든 아니면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든 같은 것은 하나님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알게 되는 것도 우리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나타내신 아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된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우리가 나타낼 나의 경험이나 행위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이전 행적을 두고 비난을 하는 것은 자신들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주가 일하신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깊이 묵상해봐야 할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 또한 주의 일하심을 말하면서도 행함을 생각하고 행함에 가치를 두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택정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사도와 신자로 부름 받은 모든 사람은 택정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도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신자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어둠의 존재로 시작하여 그러한 자신을 도구로 삼아 주의 이름의 승리를 나타내신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두는 관계로 함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고전 3:18절을 보면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누구든 자신이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면 도무지 복음을 알 수 없는 어리석은 나에게 주가 일하심으로 되어진 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간섭받으면서 주의 이름의 승리를 나타내고 전하는 자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둠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의 것으로 확정된 결과입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가 잘해서 이루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다 안다라고 쉽게 반응하지 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두고 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 나타내신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하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부름 받은 것을 신자의 본분으로 여기시고 내가 아니라 주가 자랑 되는 것에 뜻을 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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