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6 16:55

(8강) 자유를 엿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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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2:1-5

갈 2:1-5http://onlycross.net/videos/gal/gal-02010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설교>

사람이 자기의 구원과 행복한 삶을 위해 자기 선택과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으로는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애당초 자기를 위해 복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능력이 되어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아 믿음에 있게 했다면 그 믿음은 복음을 위한 삶으로 이끌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세상의 모든 일에서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생명의 문제로 바라보는 일관성 있는 믿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믿음에는 충돌이 있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믿음은 육체이고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아 믿음에 있게 한 것은 성령이라는 전혀 다른 속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과 기름이 서로 반대의 속성을 가진 물질이기에 섞일 수가 없는 것처럼 육체와 성령도 섞일 수 없는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고 말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절대 타협하여 함께 할 수 없을뿐더러 아예 서로 대적하는 원수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양보하지 못하고 지켜야 하는 자기 속성이 있는 것처럼 육체 또한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속성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아예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육체와 성령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특성은 충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육체의 소욕을 만났을 때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충돌이지 양보나 타협으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요 8:31-32절에서 예수님은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자유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자유는 양보할 수 없는 속성으로 고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훼방하고 다시 믿음 이전의 상태인 종의 자리로 끌어가는 것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보나 타협으로 함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알게 한 자유를 양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양보해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십사 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1).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에 대해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3)라고 말하는데, 사실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맥락이 없다 해도 될 만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바울은 십사 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는데 1:18절에서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한 것을 보면 11년 만에 예루살렘에 간 것이 됩니다. 예루살렘에 간 이유는 행 15:1-2절의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는 내용을 그 배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에 간 것을 두고 계시를 따라간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계시를 환상이나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경험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듣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신의 뜻을 전달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시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신비한 경험을 떠올리기 때문에 계시를 따라갔다는 바울의 말도 하나님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특별한 지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계시를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나는 계시를 따라 산다고 하면 이상한 사이비에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간 것을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전달받은 지시사항이라는 뜻에서 계시를 따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장의 내용대로라면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로 인해 발생한 다툼과 변론 때문에 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의해 예루살렘에 가게 된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조성하신 일이라는 의미에서 계시라는 말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일로 예루살렘에 가든 바울의 모든 관심은 복음으로만 집중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인 디도까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4,5)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몰래 들어온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이들이 다른 누구도 모르게 교회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면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몰래 들어왔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로 인한 다툼과 변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율법으로 인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교회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어떤 사람들, 즉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다른 복음으로 선동하고 교회를 흔들었음을 생각하면 가만히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복음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가만히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형제들이 선동하는 다른 복음을 복음이 아닌 것으로 간파하여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것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게 된 신자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는 복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기에 자유가 없는 복음은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복음은 사랑도 믿음도 없는 자를 오직 은혜로 저주에서 건져 주신 능력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십자가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이고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을 더 나은 가치 있는 존재로 가꾸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믿음에 다른 것을 더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로 완성된 은혜의 세계를 교란하는 결과가 됩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받은 신자가 과연 그것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한 심정으로 듣고 지나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지게 된 자유를 외면하고 다시 종이 되어 매이는 것에 마음을 두겠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십자가의 피로 나를 용서하시고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복음을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자로 자처하면서도 정작 자유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자유를 외면하고 멀어지면서 좀 더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행함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믿음의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유에는 자신이 관여할 것이 없으므로 막연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한 것이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에는 믿음이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믿음을 가꿀수록 다른 사람보다 나은 믿음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가꾸고 드러나는 믿음을 원하기 때문에 자유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34:8-11절에 보면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라고 말합니다.

 

 

노비를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이 계약에 가담하여 노비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으로 자유를 얻은 노비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성향으로 하나님의 계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34:16절에 보면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롭게 한 노비를 다시 노비로 삼은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으로 말씀합니다. 다시 노비로 삼은 자들은 단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성향을 따라 행동한 것일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 즉 언약보다 자기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더 귀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도 결국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없는 범주에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설령 언약이라 할지라도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나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에너의 열심과 행함을 인정해 줄게라고 속삭이며 가만히 다가오는 다른 언약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종으로 삼기 위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가 있다면 그의 거짓됨을 분별하고 알아챌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가 누구인가를 살피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유를 빼앗고 종으로 삼고자 하는 말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면서 진리가 준 자유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뭔가 주눅이 들게 하는 곳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고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에게 개인적으로도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대로 전하였다고 합니다.

 

 

유력한 자들이란 사도로 이름이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예루살렘 밖에서는 유명하다 해도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비난을 받는 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력한 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제시했다는 것은 사도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자유의 문제가 중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달음질하는 것이고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한다는 말로 드러냅니다.

 

 

바울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들은 모두 바울의 열심이 아니라 복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바울로 하여금 달리게 한 것이 바울이 달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진 자유였습니다. 복음이 달리게 하는 것이라면 달음질로 얻은 결과나 성과에 매일 필요가 없는 그것이 자유인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할례를 받아야 한다면 사람의 관심은 할례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이방 기독교인의 숫자를 자신의 업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목사가나는 목회를 하면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들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신자는 진리로 인해 자유를 가졌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말이 불편하게 다가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이 믿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생각하고 들여다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를 거짓으로 간파하지 못하고 그들의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정된 구원의 은혜로 기뻐하지 못하고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매일 뿐입니다.

 

 

자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성과나 결과가 없는 것이 복음의 진리가 있게 하는 자유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알게 된 신자는 무엇이든 이 자유를 엿보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로 반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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