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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1

갈 3:1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01.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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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교회 안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구별됩니다. 십자가가 증거 하는 것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게 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의 용서에만 마음을 두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의가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에 있는 자가 구원받은 신자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행함과 실천에 마음을 두고 그것으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자로 구별될 뿐입니다. 인간의 행함에 마음을 두게 하는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믿음과 구원의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한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3;18).

 

 

바울은 인간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것을 믿음이 아닌 것으로 단호하게 외칩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변화와 삶의 모습에서 믿음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믿음의 증거가 행함이 유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확인되는 행함을 제외하면 믿음의 증거로 확실하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상상한다 해도 그 당시의 실제 모습은 아닙니다. 상상으로 그려낸 의미 없는 헛된 공상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볼 수 있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보이고 또 보고 있다면 다른 것을 바라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가 보이는데 다른 것을 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본다면 그는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기에 다른 보이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자기의 행함과 믿음 생활을 바라보며 그것으로 믿음의 여부를 저울질하고 판단하는 것은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천 년 전에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현장을 상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우리 눈앞에 밝히 보이도록 드러나 있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는 신자는 그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우리에게 행함에 대해 당부를 하는 것이 있습니까? 선한 삶과 믿음의 열심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으로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십자가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그런 말씀을 남기시지도 않았습니다.

 

 

흔히 가상칠언으로 이름 붙여 말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에는 제자들을 향한 당부가 없습니다. 오히려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이루어야 하는 것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피로써 다 이루신 의의 완성된 세계로서의 십자가를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제자의 위치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율법으로 너희를 유혹하느냐는 의미로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를 안다면, 십자가를 본다면 율법의 문제로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으로 규정될 뿐이고, 이러한 인간의 상태는 세상이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하거나 개선되는 것 없이 그대로 존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20절에서 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는 말을 합니다.

 

 

알다시피 바울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닙니다. 설령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 해도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함께 못 박힌 강도 둘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지옥 가야 하는 강도인데 한편 강도만 낙원에 있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강도도 구원을 받는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행함으로 따지면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데 예수님의 용서가 강도까지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구원받은 한편 강도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 중의 하나는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23:39)는 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합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다른 강도는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0-41)라며 그 강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23:42)라고 말합니다.

 

 

두 강도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구별의 기준이 되었기에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서도 그 운명이 천국과 지옥으로 구별된 것일까요? 이것은 교회가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구별의 기준을 알지 못하면 똑같이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천국과 지옥으로 구별되는 사태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있는 비참한 형편에서 구원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기 육체를 위한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단호하게 같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자기 육체를 위한 예수로 바라보는 것이 곧 강도고 행악자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한 형편에 있게 된 것을 자신이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비참한 형편에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함께 못 박힌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합니다. 죄없이 죽으시는 예수님의 의로움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안목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나의 현실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육신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24-26절에 보면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는 자기 육체를 위한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모든 현실을 육신을 위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 됨을 위해 그리스도가 사는 것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현실이기에 이러한 믿음의 삶에 율법의 실천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용서를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그리스도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사탄이라는 강력한 존재의 유혹에 붙들려 끌려가는 현장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나의 존재 가치입니다. 도무지 뿌리칠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강한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의 소용돌이에 갇힌 인간에 의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현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밝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유혹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율법을 실천하면서 최고의 선한 삶을 유지한다 해도 역시 우리를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으로 신자다운 신자가 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마음을 둔 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유혹에 붙들린 것인데 그러한 실상조차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떤 율법도 신자를 신자 되게 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대로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못 박히신 예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실천이 아니라 실천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십자가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의로우심에 나를 맡기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밝히 보는 신자를 누가 율법으로 유혹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주장하는 것은 육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으로 살지만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율법적인 생각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임을 모릅니다. 행동이 변화하고 착한 삶으로 변화된다 해도 결국 저주받은 죽은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변화로 믿음과 구원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신자에게만 관여된 문제일 뿐입니다.

 

 

4:26-29절을 보면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과연 바울은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행함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 신자에게는 이 내용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율법적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령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니까 해가 지기 전까지 분노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율법적 시각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않아야 하고 자기 손으로 수고한 것으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것을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자는 더러운 말보다는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칠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도 않았고 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도 아니며 십자가를 보는 사도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은 우리가 실행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분노를 경험하게 되고, 분노의 마음을 우리의 의지로 사라지게 할 수도 없습니다. 분노를 유발한 사건이 생각나면 분노는 고개를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의 사건 자체가 항상 우리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식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짜증이 나고 예전의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화를 입이 닳도록 강조합니다. 하지만 성화는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에 뜻을 두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면 분노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분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하고 그것을 믿음의 선한 실천으로 간주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히 보이는 십자가는 변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저주받은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보게 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용서의 능력이 됨을 믿게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반복되어 드러나는 죄의 현실에서 어제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항상 오늘의 새로운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신자는 율법에, 믿음의 행함이라는 것에 눈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이 의로움과 완전함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누가 꾈 수 있겠습니까?‘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믿음에 합당한 선한 행함이 없느냐?’라는 유혹으로도 신자를 흔들 수 없습니다. 믿음이 육신으로 행하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당해지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정당함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요?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 앞에서도 정당한 자 되는 것에 가치를 둘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에게 십자가는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정당하고 옳은 기독교인 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지옥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아들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 한탄을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눈앞에 밝히 드러나 보이는 십자가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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