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7 16:09

(14강) 시작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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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2-3

갈 3:2-3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020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설교>

성도라는 존재를 가능케 하는 첫 번째 조건은하나님의 뜻입니다. 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시는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그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게 하신 것도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됨으로 존재하게 된 결과물이며 이 결과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관계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도, 교회라는 존재를신비의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 의해서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결과물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존재라는 것인데 그들이 성도이고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성도라 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시선을 하나님의 활동이 아닌 나의 활동에 두게 됩니다. 나의 활동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믿음의 여부를 저울질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을 보내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자처하면서도 믿음의 출처와 성도라는 존재가 무엇에 의해 나타난 결과물인가에 대해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어리석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육체, 즉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성도인데 그러한 성도 됨을 율법의 행위로 나타내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라며 추궁하듯 묻습니다.

 

 

바울의 물음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답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성령을 받은 것은 듣고 믿음으로다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더니 성령이 오셨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자기 행위로 돌아가 성령을 생각하는 결과일 뿐입니다.‘내가 예수를 믿었더니라는 말 자체가 자기 행위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받게 된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너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율법의 행위가 있을 때 받았느냐라는 뜻의 물음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이 일하신다 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물음의 의도입니다.

 

 

6:9-10절을 보면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 13:14-15절에서는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때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때의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완악함이 절대로 변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듣고 믿는 것은 우리로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결국 성령을 받고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이 듣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수고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생각하는 수준에서의 행함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듣고 믿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물음은너희가 성령 받은 것을 율법의 행위로 아느냐 듣고 믿음으로 나느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물음을 이렇게 이해한다 해도 역시 어렵지 않게듣고 믿는 것으로 성령 받은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는 성령 받음을 알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 받음은 율법의 행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물음은 믿음과 행위를 구분합니다. 믿음에서 율법의 행위가 나올 수 없고 행위로 믿음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 자체가 인간이 아니라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만 가능하고 성령으로 시작하는 믿음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하나로 묶는다면 믿음의 본질은 훼손되어 믿음 아닌 믿음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아마 자신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막연한 생각일 뿐입니다. 육체로 마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기에 성령으로 마친다고 스스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고 육체로 마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성령으로 마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듣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십자가 복음이 듣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의 문제에서 우리의 육체로 시작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도 의로움도 회개도 성도 되는 것도 육체가 아닌 성령으로 시작됩니다. 육체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인해야 하는 것은 육체의 모든 일입니다. 육체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본문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성령의 일하심을 믿고 증거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육체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라운 신비이고 기적의 사건입니다. 누군가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교회 생활을 하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누구나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 되는 것은 창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존재에 담긴 내막을 알면 성령의 오심과 일하심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으로 우리의 현실에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 아닌 헛된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진리로 인한 자유입니다.

 

 

만약 믿음이 우리의 선택의 결과물이라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감사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놀라운 신비로 기적의 사건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은 너무 과장된 표현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누구나 결심만 하면 믿음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선택으로 시작한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도 믿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에게 행위는 필연코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수준은 행위의 여부로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신앙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십자가가 무엇을 증거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교회 생활에서 경험하고 실천했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그 영혼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십자가가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근본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율법의 행위에 관심을 두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10:3-4절을 보면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의를 실천하여 하나님의 의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의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신앙 세계에 율법의 행위가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도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내막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타난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만 전하면 됩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위의 여부에 따라 인간의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가 구분되고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지만 십자가라는 기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행위와 관계없이 악인으로 규정됩니다. 이것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은 이러한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의를 행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어 십자가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율법의 참된 취지입니다.

 

 

믿음의 시작이 성령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침 또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정하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마쳐지는 믿음에 율법의 행위는 개입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인간의 역할이라는 것에 미련을 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역할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폭로되면서 인간의 무능과 불가능성을 품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임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신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열심과 행위로 인한 의가 섞이지 않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22:12-13절에 보면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때문에 믿음에는 우리가 채워야 할 부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셨고 예수님이 마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져 있고 이 믿음이 우리를 자유 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믿음을 채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육체로, 저주로 마치는 것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를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서 반복되고 있는 십자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보인다면 우리의 행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행위 자체가 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인데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행위로 증명하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 흘림이 삭제된 거짓된 십자가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어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을 인간을 보조하는 역할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과 통로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로 향해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게 하신 것도 십자가를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위해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래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에 성령이 없이 믿음은 시작할 수도 마쳐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킬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입니다. 믿음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는 신비의 사건으로 끝까지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성령으로 시작된 믿음은 성령으로 마쳐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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