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6 18:35

(65강) 어리석은 용납

조회 수 72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성경본문 고후 11:16-20

고후 11:16-20http://onlycross.net/videos/co2/co2-11162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설교>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부활의 종교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심판과 용서가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거룩한 성도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내용과 본질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들이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자신이 이러한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며 믿고 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자도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신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혼인 잔치를 하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믿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기 때문에 잘못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이 알고 있는 십자가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로 확인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와 위치를 굳건히 하기에 힘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의존하는 자기중심으로 치우쳐 있는데도 그러한 자신은 보지 못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위선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고 있다고 여기는 십자가와 부활이 이론, 즉 성경의 교리로만 존재할 뿐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처럼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거짓 사도이고 속이는 일꾼입니다.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교회라면 이러한 거짓 자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들을 용납했고 이들이 전파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는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20)라는 말처럼 교회 위에 힘으로 군림하며 착취를 한다 해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용납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를부활의 종교로 말하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은 자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의 능력으로 임하여 죽음에서 구원된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이 알고 있고 말하는 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엄밀히 말하면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회 또한 세상의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과 무관하게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의 은혜가 베풀어진 거룩한 무리가 성경이 증거 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는 통용되지 않는 다른 방식과 원칙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복음과 다른 방식과 원칙이 교회에 들어온다면 교회는 그것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으로 참된 복음을 토대로 세워져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으로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고 바울은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뺨을 치는데도 그들을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배받기보다는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지배하는 자에게 반발하지 않고 기꺼이 지배를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배하는 자를 권세자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가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는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사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들은 사람을 지배할만한 무엇인가를 갖추고 접근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사라는 본래 의미에서 벗어난사람들을 지배하고 지지를 받는 있는 특출한 능력을 갖춘 자라는 의미로 변질된 카리스마를 말합니다.

 

 

고전 1:12절에서 바울은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능력에 따라 다르게 평가한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취향과 안목과 판단에 따라 사도를 비교했고 그로 인해 분파가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거짓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다 해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 1:13)라는 말로 사도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제아무리 대단하게 보이는 사도라 해도 그가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죄에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사도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세상의 지혜와 강함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자기들을 다스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구한 것을 보고 기드온의 다스림 아래 있고자 한 것입니다. 기드온을 능력이 뛰어난 용사로 여긴 것이고, 그러한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 어떤 이방 나라가 공격을 한다 해도 안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들에게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8:24)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알았고 전쟁의 승리 또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결과로 알았기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믿음은 사람의 다스림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마치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으로 여기면서 특정 인물을 높이고 그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삼상 8장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유는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함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사람에게로 눈을 돌리고 특별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지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더 신뢰하는 종교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사탄을 사탄으로 알아볼 영적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고, 언제든 사탄의 유혹을 즐겁게 받아들일 무지한 인간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분별하기는커녕 즐겁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 생활이나 행동의 여부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은혜로 일하시는 것을 구원의 현실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업적을 이룬다 해도 자신의 인간 됨이나 행한 일과 무관하게 은혜로 일하시는 예수로 인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최고의 환경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라면 인간의 행위나 일함이 아니라 주가 일하시는 현실에 대해서만 증거 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은 중매자의 일로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일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 생명에 속한 자들이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십자가로 이루어진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환경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 주변에 아파트가 많은지 등의 지리적 여건을 따지며 그것을 중시하는 것은 교회를 내세워 얻고자 하는 다른 노림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를 교회로 드러나게 하는 최고의 환경이 십자가로 나타난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점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셨다는 것은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 능력으로 작동하는 환경 속에 교회를 두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교회를 다스리는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이 노리는 것은 은혜와 사랑이라는 교회의 환경을 허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것도 좀 더 능력 있는 뛰어난 자로 가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두게 하고 자신을 의지하고 다스림 아래 있게 함으로써 교회가 존재하는 은혜와 사랑이라는 환경을 잊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15절을 보면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아가서에서 포도원은 왕이 여인과 사랑을 나눈 장소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포도원은 사랑의 흔적이 있는 것이고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는 것이 그 흔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우가 이러한 포도원을 허는 존재로 등장한다면 그것은 왕의 사랑을 훼방하는 적으로 나타나고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에 거짓 사도가 등장하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은혜와 사랑의 환경을 허물고자 하는 사탄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사탄에 대해 너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의 존재와 정체와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활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 또한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반기며 그들의 다스림 아래 있기를 원하는 어리석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우가 들어와 포도원을 허는데도 불구하고 포도원이 허물어지는 것도 모르고 여우를 여우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현실로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심각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고린도 교회였기에 바울은 여우를 여우로 알아보는 영적 안목이 있는 자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사도의 존재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16-18)라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사도다움을 자랑이 되는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면서 바울보다 거짓 사도를 신뢰하고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용납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도 자기의 자랑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자랑은 약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결코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감추고 싶어 할 약점이 되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 후손,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거짓 사도들이 자랑하는 육체의 조건은 바울에게도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바울은 다른 자랑거리를 들고나옵니다. 거짓 사도들의 자랑거리와 전혀 다른 것을 자랑하면서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참된 자랑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교회에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들을 분별하여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뜻일까요? 물론 교회가 거짓 사도가 전하는 다른 복음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더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거짓을 거짓으로 분별하게 된다 해도 때로는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을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함이라고 했을 때 비로소 환하게 드러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한계와 죄의 성향들을 하나님이 모두 이겨내시며 그리스도를 믿음의 길에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의 어떤 악함과 죄마저도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끊어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는 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본문의 내용에는다른 복음으로 너희를 미혹하는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고 쫓아내라는 의도가 담겨있다기보다는 도무지 하나님의 교회라 할 수 없고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찾아와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이 교회가 존재하는 완벽한 환경임을 깨닫게 된다면 자연히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다른 복음은 받지 않을 것이고 거짓 사도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어리석은 용납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이고 생존을 위한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반대로 강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굴립니다. 이러한 세상 방식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인이 목사를 의존하고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아멘으로 반응한 것이나, 목사가 힘 있는 교인을 의존하는 모든 것이 교회를 허무는 여우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극복하시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붙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며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인간의 모든 열심과 행함과 육체의 조건들은 초라한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 사탄의 일꾼은 열심히 행하고 실천해서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거짓된 것의 다스림을 용납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환경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1.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Date2022.01.01 By신윤식 Views1867
    read more
  2. 고린도전서 강해 이동

    Date2019.09.14 By신윤식 Views12600
    read more
  3. 동영상 파일에 대하여

    Date2011.03.03 By신윤식 Views7388
    read more
  4. 이전 홈페이지 주일오전설교 들어가기

    Date2010.01.01 By은석교회 Views39255
    read more
  5. (46강) 그대로 거두리라

    Date2022.04.24 By신윤식 Views656
    Read More
  6. (45강) 자기의 일을 살피라

    Date2022.03.20 By신윤식 Views1045
    Read More
  7. (44강) 성취할 법

    Date2022.03.13 By신윤식 Views647
    Read More
  8. (43강)성령으로 행할지니

    Date2022.03.06 By신윤식 Views683
    Read More
  9. (42강) 성령의 열매

    Date2022.02.27 By신윤식 Views669
    Read More
  10. (41강) 육체의 일

    Date2022.02.20 By신윤식 Views610
    Read More
  11. (40강) 성령을 따라 행하라

    Date2022.02.13 By신윤식 Views738
    Read More
  12. (39강) 사랑으로

    Date2022.02.06 By신윤식 Views631
    Read More
  13. (38강) 십자가의 걸림돌

    Date2022.01.30 By신윤식 Views708
    Read More
  14. (37강) 심판을 받으리라

    Date2022.01.23 By신윤식 Views736
    Read More
  15. (36강) 믿음을 따라

    Date2022.01.16 By신윤식 Views722
    Read More
  16. (35강) 그리스도의 유익

    Date2022.01.09 By신윤식 Views737
    Read More
  17. (34강) 멍에

    Date2022.01.02 By신윤식 Views1559
    Read More
  18. (33강) 자유 있는 여자

    Date2021.12.25 By신윤식 Views893
    Read More
  19. (32강) 약속의 자녀

    Date2021.12.18 By신윤식 Views793
    Read More
  20. (31강) 두 언약

    Date2021.12.11 By신윤식 Views805
    Read More
  21. (30강) 율법 아래

    Date2021.12.04 By신윤식 Views773
    Read More
  22. (29강) 해산하는 수고

    Date2021.11.27 By신윤식 Views827
    Read More
  23. (28강) 원수가 되었느냐

    Date2021.11.20 By신윤식 Views72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