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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14

고후 12:14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4.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설교>

사도는 십자가의 증언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오직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세상에 나타낸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무능력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증언하는 자가 사도라면 무엇보다 자신이 무능력한 존재임을 알고 십자가만 구원의 능력임을 증언하고 자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라는 직무에 대한 해석과 인식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가 진정한 사도입니다.

 

 

이러한 사도는 교회를 자신의 노력이나 활동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내가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세워진 교회라는 생각이 일절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한 의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이 오셨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교회의 무소유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자신의 지분을 전혀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해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활동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물처럼 보일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면서 다만 자신의 열심과 활동에 초점을 두는 사람에게 교회는 자기로 인한 결과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자기 소유화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노력과 열심에 의한 결과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를 가장한 거짓 사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 11:13)라며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무소유 정신은 단지 교회 재산을 사유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람을 소유화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를 사도가 아닌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말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사실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지체를 그리스도께 속한 거룩한 성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드러내는 것은 다툼, 분란, 파벌, 시기, 미움 등입니다.

 

 

성도라 이름하는 존재는 인간의 지혜와 설득에 의해 탄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의만 의지하는 성도 됨은 오직 성령 세례로만 가능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현장으로만 다가왔던 것이지내가 복음을 전해서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기에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로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14)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로 가기를 준비하였는데 여전히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교회로부터 필요한 비용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돈을 초월한 사도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여러 교회로부터는 비용을 받았다는 점이 바울의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정신이라면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로 비용을 받는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비용을 받는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한 것일까요?

 

 

교회를 사유화하고자 했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에 비용을 받지 못한 것으로 비난하고 교회는 그들을 말을 들으며 바울을 오해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비용을 받으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요? 혹여 비용을 받는 것으로 그런 오해가 덮어진다 해도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도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거나 영혼의 생명을 살릴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참된 사도로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영혼의 생명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사도로 인정 받고 받지 않고의 여부는 바울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사유화하고자 하는 거짓 사도들에게는 참된 사도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 뜻대로 주장하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필히 교회로부터 참된 사도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령하고 경건하며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의 일하심을 알고 그로 인한 기쁨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 9:9-10)라는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25:4절의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여서 하는 말인데, 이것을 소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일을 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농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소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면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농부에게는 소가 귀중한 존재입니다. 농사를 위해 소는 없으면 안 되고 귀한 재산이기도 합니다. 그런 소를 먹을 것이 아깝다고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기만 하는 농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소에게 망을 씌우고 곡식을 떠는 것은 수확하는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입니다. 곡식은 소가 먹을 것이 아니라 소를 부리는 농부가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농부가 먹을 곡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곡식은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힘들었지만 한 해의 농사를 수확하는 그때만큼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도 소 역시 곡식을 수확하는 일에 참여 함으로써 농부의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농부가 곡식을 떨 때 실제로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24:19절에 보면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감람나무를 떤 후에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고 하시고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남은 것을 역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고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땅이 없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구제 차원의 조치로 이해하기 쉽지만, 만약 단지 그런 뜻이라면 차라리 소득의 얼마를 약자를 위해 사용하라고 하시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게 하여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받고 농사를 짓고 곡식을 수확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하신 은혜의 결과이고 혜택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누리를 곡식을 수확하는 기쁨과 즐거움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취지로 그러한 법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개인의 가치와 기쁨과 즐거움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신명기의 법을 생각해 보면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시형제 결혼법입니다. 결혼한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고 남편의 형제가 아내로 맞아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혼하여 첫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로 하여금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는 것이 시형제 결혼법입니다.

 

 

이 결혼법에도 개인의 가치와 선택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혼이 아니라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기 위한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약속의 땅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정신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개인의 존재 가치와 기쁨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울이 찾고자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환영하는 자기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방법은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으로만 소통되는 관계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러한 교회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도에게는 재물보다 복음으로 소통되는 사람이 더 귀하고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비용을 받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음에도 그것을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고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는 말에서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돈이 없어서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언제나 부모가 아닌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더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에게는 자신보다 아이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아이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진심입니다. 교회로부터 비용을 받고 좀 더 편하고 넉넉한 형편에서 다니는 것보다 복음으로 기뻐하는 주의 백성을 찾게 되는 것이 바울에게 더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같이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교회가 목사를 선택할 때도 인품과 인성, 그리고 교회를 번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살핍니다. 사람 마음에 드는 목사를 찾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도 얼마든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할 수 있고,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운 윤리 도덕의 기준에 스스로 속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를 못합니다. 이 또한 십자가 정신으로 깨어있지 못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주지해야 할 사실은 여러분께 생명이 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살리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나와 타인, 즉 사람으로 향하게 되어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주가 일하심으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사람이 일하는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하심에 손뼉을 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주를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나 한 사람의 가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존귀한 것으로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의 다른 점은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참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모든 가치를 두는 반면 거짓 사도는 자신에게 가치를 둡니다. 물론 거짓 사도들도 하나같이 예수님이 귀하고 십자가가 가장 존귀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주가 일하고 계시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 일하고 일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주의 열심에 박수를 보내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종교적 열심을 환영하고 복수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종교적 열심에 따라 교인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만 소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로움만 인정되고 사람의 모든 의는 거부되어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열심만 통하여 사람의 종교적 열심은 모두 거부되어야 합니다.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열심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거나 평가받기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인의 열심에 손뼉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실 예수님의 일을 다 마쳤고 남은 것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주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살아계신 주가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열매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열심은 믿음의 증거로 높일 받을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가 사람의 기쁨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교회를 자기 기쁨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교회를 자기를 위한 것으로 사유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성령 안에 있는 교회는 주의 일하심을 믿으며 십자가의 은혜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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