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0 15:20

(74강) 사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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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15-19

고후 12:15-19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151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6.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설교>

기독교인의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믿음과 연관된 모든 것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됨을 모르고, 신자가 신자 됨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교회와 신자 됨을 생각할 때 간과하지 않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주께서 일관성 있는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일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일하심은모든 것이 주께서 일하신 덕분입니다라는 일관성 있는 고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고백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가운데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현실로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수고와 노력은 부인하게 합니다. 이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우리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보자라는 발상 자체가 믿음이 아닌 육의 생각이라는 것을 간파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됨은 인간의 수고에 의해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교회를 부인함으로 증거되는 것인데 오히려 인간에 의한 교회를 구상한다는 것이 스스로 교회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교회, 신자란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의 수고와 행실로 신자답게 될 수 없다면 사도 또한 개인의 성품이나 행실에 의해 사도답게 되고 인정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사도라는 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사도의 여부를 저울질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인데도 성도 됨을 모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바라보며 사도 됨을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것은 곧 신자 됨에 대해서도 주의 일하심을 벗어나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의 사도 됨, 주께서 부르시고 주의 일하심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도의 증표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요? 이것을 우리는 오직 주께 매인 자로 주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편지를 쓴 바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글에서 나타나는 일관성이 사도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비용을 사용하고 자신까지도 내어주겠다고 말합니다(15).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모든 힘과 인생을 바울 자신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영혼을 위해 소비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자신의 이득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교회에 짐을 지우거나 짐이 된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짐을 지우거나 짐이 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바울이 교활한 자가 되어 속임수로 교회를 취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16).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교활한 속임수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교회가 그런 말에 동조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보낸 누구도 교회에서 이득을 취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디도를 보내고 그와 함께 형제 한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 누구도 너희에게서 이득을 취한 일이 없음을 말하면서 그러한 디도와 바울이 동일한 성령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18). 디도가 교회에서 자기 이득을 취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성령으로 행하기 때문이고, 바울 또한 동일한 성령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에 자기 이득을 위해 속임수로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바울과 바울이 보낸 이들을 변명하고자 하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내용이우리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도가 아니다라는 자기변명과 변호로 일관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변명의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는 말처럼 교회에 은혜를 끼쳐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선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 바울의 편지를 본다면 과연 은혜를 끼치기 위한 선한 말로 듣게 될까요?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사랑을 엿보는가의 여부로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바울이 자신들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말을 한다 해도 그것이 교회를 위한 사랑임을 안다면 덕을 세우고자 하는 선한 말로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보지 못하면 선한 말이 아니라 자신들을 야단치는 불편하고 듣기 싫은 말로 들릴 것이 자명합니다. 복음이 그런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까지도 내어준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랑입니다. 자신까지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이라면 고린도 교회도 바울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바울이 교활한 자가 되어 속임수로 교회를 취하였다고 말한 자가 있고 그 말에 동조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바울의 사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쓸 비용을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비용을 사용하며 자신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베푸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랑에 감사하기는커녕 속임수를 쓴다고 비난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인간적인 사랑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랑을 받는 우리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자기사랑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으로 관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보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사도의 사랑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까지 내어준다고 하면서 사랑한다 해도 고린도 교회는 시큰둥합니다. 바울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기하는 가운데서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데 교회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에 바울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로부터 자기 이득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보낸 모든 이들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자기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 단지 인간성에 의한 것이었다면동일한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든 성령으로 행한다면 자기 이득보다는 영적인 문제를 더 중시하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이득이라는 것은 잠시 쥐고 있을 뿐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있지만, 영적인 문제는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성령으로 행한다는 표는 잠시 잠깐의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생명의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고 자신까지 내어주는 것을 크게 기뻐하는 바울의 사랑이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고 사도 됨에 대해서도 바른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함께 하는 것은 오직 영혼의 문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생명의 능력임을 알고 피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영적인 세계를 중시하는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의를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를 사랑으로 받게 될 것이고 바울에게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인 세계가 아닌 자신과 교회의 존재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사랑보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소위 바람직한 교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쓰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고 할 때는 과연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엇에 가치를 두는 자로 모이고 함께 하는가에 관해서 묻고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나는 나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는데 너희는 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서 너희가 어느 정도로 자신의 의로움과 자기 존재 가치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절감하라는 의도의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관심은 십자가의 피로만 향해야 합니다. 자신과 교회는 항상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자가 되십시오라거나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가차 없이 사탄의 말로 간주하고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가 사도의 말과 행함에서 주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하는 바울이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든 누구든 어떤 인간에게서도 사랑은 나올 수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바울 안에 주가 계신다는 뜻일 뿐입니다. 바울 안에 있는 주의 사랑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의 길에서는 십자가의 피로 인한 회개가 있으며 주의 공로만 높이게 되는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다른 길에는 인간의 의와 공로가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누가 더 의롭고 공로가 있는지로 다투는 경쟁이 있습니다. 하나의 길에는 구원이 있고 다른 길에는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이 있는 길로 가기를 기뻐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가 세워지는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구원의 길에서는 십자가의 피만 존귀한 것으로 높여집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다고 생각되기에 구원이 있는 길인데도 찾지를 않습니다. 이것이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라는 말씀의 현실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수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들로 자신을 내어주므로 흘리신 피의 은혜와 사랑보다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교회 되었음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모든 일에 대해 개인의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 안에 있는 주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말하는 것이 영혼을 위한 것이고 영적 세계에 모든 가치를 두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0:28-31절에 보면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합니다.

 

 

사나운 이리는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을 동원하여 자기를 좇게 합니다.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활한 자가 속임수로 사람을 취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즐겨 하고 사람을 좇는 이 세대의 현실에서 말씀이 하는 일은 눈물로 훈계하는 것이기에 말씀의 훈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사도의 사랑이고 증표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도가 교회에서 취할 이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신까지도 내어주는 사도의 사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셨다는 것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됩니다. 피로 사시고 피로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피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일 뿐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피 외에 인간의 모든 것은 거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 헌신, 수고, 열심, 선함, 어느 것 하나도 인정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모입니다. 이것이 사도를 사도로, 사도의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이며 오늘 우리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피라면 복음에 의해서만 교회 된다는 것이 분명한 결론이 됩니다. 이러한 교회 됨에 인간의 윤리와 도덕, 종교심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그것을 교회로 여기는 것이 실상은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소리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을 포함 시킵니다. 이것이 거짓임을 아는 것이 바울과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이이런 신자가 되자는 유혹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신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최상의 모습을 갖춘다 해도 주의 피로 이루어진 공로 앞에서는 거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 영생입니다. 죽음에 있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 주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은 우리가 죽은 자임을 깨닫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사랑은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신자들에게서만 공감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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