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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3:1-3

고후 13:1-3http://onlycross.net/videos/co2/co2-130103.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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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설교>

사도 바울의 말은 항상 우리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살아가는 복음의 세계와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하는 복음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로 단정하고 대충 넘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일에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내용은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도라면 예수님의 용서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말과 글과 행동에 대한 우리의 예상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원수에서 용서를 받아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힘써 용서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우리 나름의 선입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상을 벗어나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후 2:7절을 보면 바울은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4:32절에서도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는 말을 하고 골 3:13절에서도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용서를 알고, 용서받은 자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임을 아는 바울이 무슨 이유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세 번째 고린도에 갔을 때도 예전의 죄가 그대로 있다면 이번에는 결코 그대로 간과하지 않겠다는 엄포의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두 번째까지는 용서하지만 세 번째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될 뿐이며 용서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또한 바울은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3-24)라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가 가지 않은 이유가 교회를 아끼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세 번째 가려고 한 것이나 아낀다는 교회를 향해 용서하지 않겠다는 험악한 말을 하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죽은 적이 없는 바울의 용서가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 담겨 있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복음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두세 증인은 모세 율법에 등장합니다. 17:5,6절의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을 행한 자를 처벌하여 죽일 때 두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심판할 때 억울함이 없게 하라는 취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보다 두세 사람의 증언에 의해 죄를 심판하는 것이 좀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세 증인의 의미가 그런 것이면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편에서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지향하는 법이 됩니다. 재판의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취지의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는 것으로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조차 조작될 가능성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의미로 두세 증인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에 다시 갔을 때 두세 증인을 세워 바울이 사도로 아무 부족함이 없음을 확정하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어떤 경우이든 그런 의미로 두세 증인을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율법을 바울이라는 한 개인을 위해 이용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 자신을 변호하고 교회가 잘못했음을 증언하기 위해 두세 증인을 세우겠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에 두세 증인이 등장하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자가 없게 하라는 취지가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발하고 말씀을 무시하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증인은 죄지은 자가 자신의 죄를 부인할 때 그 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따라서 악을 행한 자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심판을 받고자 한다면 증인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부인할 때 죄를 입증하기 위해 증인이 등장하는 것인데,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죽임을 당해야 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죄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의 죄는 아니라고 항변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다 해서하나님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며 심판을 당연한 처벌로 받아들일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믿음을 말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간성입니다. 가령 어떤 힘든 일 앞에서하나님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항변이 항상 자신의 죄는 부인하고 의로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17장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악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며 일월성신에게 절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 자가 있으면 두세 사람의 증언으로 돌로 쳐 죽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안되는 것을 우상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잘됨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언약을 어기고 악을 행하는 것인데 이것을 죽임을 당할 죄로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이것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다 해도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두세 사람의 증인이 예수님과 하나님이시라면 죄를 인정할까요?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실제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라는 알량한 자기 열심을 내세우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의 가치는 무시하는 언약을 어기는 자로 살면서도 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8장에 보면 예수님이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8:13)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수님은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8:17-18)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은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모른다면 예수님이 말씀한 아버지의 증언은 무용지물입니다.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존재의 증언을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도 아버지도 알지 못함으로 예수님의 증언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죄인 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고린도 교회의 실상입니다.

 

 

그러면 증언자를 두 사람으로 말하지 않고 두세 사람으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증언자가 셋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일 5:7-8절에서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한 일을 말합니다. 피는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고 요한의 물세례 또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증언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고린도 교회에 두세 사람의 증언자에 사도 바울이 한 사람으로 포함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하면서 바울의 증언이 참되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이것이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3)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를 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보고 확인하고 사도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구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바울의 증언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용서의 권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 밖에 있음에 대한 선포입니다.

 

 

요일 5:10-11절을 보면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있는 증거로 인해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강함을 항상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믿는 자 안에 있는 증거는 단지 구원의 증표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증거자로 계신다면 그 증거는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고 저주가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강함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강함을 자기 안에서 체험하는 신자는 외적인 조건을 자신의 강함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바울에게 증거를 구하는 것은 그들 안에서 강하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되기에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라면 주의 도우심과 성령의 능력이 강한 모습으로 증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심을 알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일 뿐입니다.

 

 

고후 2:9-11절을 보면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은 교회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순종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순종이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용서를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나 외적인 조건은 예수님의 용서 앞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죄를 알지 못하고 용서의 존귀함과 가치를 무시하는 길에 있는 자들에게는 용서 없는 심판만이 있을 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용서를 존귀하게 여기고 감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사탄의 계책에 속음으로 나타나는 자기 착각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있고, 그러한 본성은 절대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복음을 아는 신자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내가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용서의 능력으로 거룩한 성도 됨을 고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약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 강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 강함을 경험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고, 이들은 당연히 인간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함을 믿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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