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9 19:04

(53강) 착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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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9:8-9

고후 9:8-9http://onlycross.net/videos/co2/co2-09080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과 성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백지상태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라는 죄의 본성으로 자리한 종교성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지 않았고 성경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면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이 성경을 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신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인간 나름의 지식이 기본적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돕고 지켜주는 신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성에 의한 지식이며, 이 지식에 맞추어 성경의 내용을 수용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부합되는 내용으로 변질한 해석만 내어놓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8장과 9장에서 다루어지는 연보에 대한 내용에서 그러한 실상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연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며 정성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연보가 돈을 바치는 행위로 인식되어 있으며 돈을 바치는 행위에는 믿음의 정도와 은혜받음의 보답,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으로 8장과 9장을 읽었을 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하는 연보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오해하고 해석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연보는 많은 연보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는 연보는 자신의 형편을 넘어선 연보로,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연보는 돈이 아까워 적게 하는 연보로,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착한 일은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로 해석할 것입니다.

 

 

사실 9절에서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의로운 착한 일로 여기시고 그 일이 교회에 넘치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히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의로운 착한 일로 해석했을 때의 성경적 오류에 대해 생각한다면 분명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시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선을 행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를 돕는 연보를 의롭고 착한 일로 규정하고 실천을 가르친다면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내용과 충돌되지 않는 해석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선을 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찾는 신자는 성품이 변하는 성화를 이루어 의를 행하는 착한 일을 하게 된다는 인간적이고 구차한 해석만 내어놓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 시작하여 세상 마지막 때까지 존재하는 모든 인간 중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선언은 더럽고 무익한 존재이며 당연히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2)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먼저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는 말은가난한 자를 돕는 연보는 은혜받은 자가 행해야 할 착한 일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일을 행함의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면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의 해석 또한 모호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행함을 넘치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지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 한번을 넘치게 한 것으로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열 번을 해야 할까요? 스무 번을 해야 할까요? 문제는 착한 일에 대한 우리의 행함의 여부와 무관하게 성경은 인간을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착한 일에 미련을 둡니다. 믿음의 여부와 그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 중의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결국 착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신자는 착해야 하고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바울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연보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받은 신자가 행해야 할 착한 일이기 때문에 은혜를 넘치게 받은 것처럼 착한 일을 넘치게 할 것을 독려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연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일까요? 아니면 착한 일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는 것일까요?

 

 

연보의 목적이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에 있다면 하나님은 교회를 돕기 위해 다른 교회에 돈을 요청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다른 어려운 교회를 수시로 찾아야 하며 그들을 돕는 연보가 넘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 교회가 있을까요?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사람이 행하는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고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4-16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착한 행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적인 행실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윤리적인 행실이 곧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고 윤리적인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윤리는 선하다는 시작에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기독교가 윤리화 되고 설교 또한 윤리적 교훈으로 전락하여 세상 종교의 말과 다를 바 없는 성경으로 변질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착한 일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112:9절에 보면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9절의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준 것을 의가 영원토록 있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의가 영원토록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의를 죄가 없는 상태로 생각해 보면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영원토록 죄가 없는 의인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우리를 영원히 죄 없는 의인 되게 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바울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연보가 아닌 다른 연보를 착한 일로 가르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일 5: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도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문제에는 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두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8:1-2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죄로 선언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누구도 범죄하지 않는 죄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는 것이 은혜를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연보로 연결되는 것일까요?

 

 

33:14-16절을 보면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고 말합니다.

 

 

악인이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는 것을 가난한 자에게서 저당 잡았던 것을 돌려주고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악인은 본래의 죄가 기억되지 않으며 반드시 살고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저당물을 도로 주고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은 본래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나의 소유를 흩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흩어 구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착함을 보여주고 인간의 영광이 되는 구제는 구제가 아닌 것입니다.

 

 

5:20-21절을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면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죄가 더욱 드러나게 일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신의 죄를 알수록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으로 죄 없는 상태로 예수 안에 있게 된 은혜의 넘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착한 일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제를 위한 연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적인 의미의 착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 은혜를 넘치게 하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4:28절을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합니다.

 

 

도둑질하는 자가 자기 행실에서 돌이키는 것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까지를 돌이키는 것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둑질하는 자로 산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타인의 것을 훔치는 행실의 여부와 무관한 도둑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도둑질을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의도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애초에 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이치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은 주의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흩어 버리는 것으로 소유권이 나에게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연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둑질에서 돌이키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교회에 연보하고 구제한다 해도 그것으로 믿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면 결국 내 것으로 연보했기에 공로 또한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사고방식 안에서 행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흩어 버리는 것과 무관한 연보이기에 도둑질하는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소유권 포기를 의미합니다. 소유권을 포기했기에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에 넉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다고 해서 내가 어려운데 어떻게 연보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내어 연보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연보를 통해서 신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생명에 속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존재함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와 의의 선물이 넘치는 현장입니다. 은혜와 의가 넘친다면 결국 흘러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의가 전부입니다. 이것이 신자 됨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은혜와 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의가 드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의가 넘치는 신자가 무엇을 하든 자신의 믿음으로 행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아예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착한 일은 주가 행한 일밖에 없습니다. 주가 행하신 일만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주의 착한 일에 동참하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토록 의가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모든 관심을 두고 주만 자랑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부요는 돈이 아니라 영원히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신자는 돈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 때문에 든든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돈을 든든함으로 삼고자 하는 악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색함과 억지로 하는 연보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보를 하면서도 참된 연보가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연보 하신 생명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착한 일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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