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3 19:06

(55강) 싸우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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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0:1-6

고후 10:1-6http://onlycross.net/videos/co2/co2-10010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설교>

우리가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개입되면서 전혀 다른 세계가 됩니다. 그중의 하나는 현실 세계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하던 것이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고 대신 세상이 관심 두지 않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자리하게 되는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현실 세계를 살아가던 가치관 그대로 성경을 대한다면 십자가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눈먼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증거 하는 세계는 기존의 현실 세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가치관 그대로 성경을 대한다면 그에게 신앙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자신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것과 함께 세상에서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결코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심지어 자기 가치를 위해 하나님과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그 시작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기 가치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신자가 아닌 종교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는 이유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나의 구원이라는 혜택을 제공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이 중심이 된 기존의 가치관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복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도가 증거 한 복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나타내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항변합니다(16:21-22).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것을 항변하면서까지 거부했을까요? 예수님을 자신의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줄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을 영광되게 만들어 줄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임당하여 사라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은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증거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 가치를 둠으로써 예수님이 만족이 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는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4-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싸우는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과 다른 싸움을 하는 것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힘 있는 자가 이기는 육신에 속한 싸움입니다. 따라서 무기 역시 육신에 속한 힘 있는 것이어야 승리에 유리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힘이 되는 것만이 육신과 육신이 경쟁하고 싸우는 세상 싸움에서 무기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육신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돈과 권력보다 더 힘 있는 무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더 부요하고 힘 있는 자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신에 속한 기존의 가치관의 시각일 뿐입니다.

 

 

12장에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칠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죽은 후에 부활한다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 25:5절의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라는 규례를 근거로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세우신 규례이기 때문에 만약 부활의 세계가 있다면 이 말씀도 그대로 유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이 질문한 것과 같은 불합리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혼란만 있게 되고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다투는 상황이 되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인데 그것이 무슨 부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으로 부활의 세계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12:24-25)고 말씀합니다.

 

 

부활의 세계는 육신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가 없고 따라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현재의 인간관계 안에서 부활의 세계를 생각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일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육신을 힘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해주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두개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채 육신에 속한 싸움에 열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1:23-24절에서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도로 부르시고 거룩하다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능력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능력을 보지 않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능력으로 간주하여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외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이것은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10)라는 말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육신과 말재주가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신 바울에 대한 평가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 교회와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고 평가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날 때 표면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교회 일을 맡아 할 때 그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열심을 내게 되고 그것이 경쟁이 되어 있는 것이 싸움판으로 전락 된 교회의 현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아는 신자로 고린도 교회를 대한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실제로 교회에서 파당을 만들고 분란을 조장하고 음행을 하고 자기 신앙만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음 없는 자로 평가하며 책망할 것입니다. 설령 겉으로는 인사하고 악수한다 해도 속마음에는 그를 향한 가시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1,2절을 보면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말합니다.

 

 

유순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로 생각하면 성품이 부드럽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면 바울의 성품이 부드러워서 고린도 교회를 대할 때 그들의 문제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바울의 부드러운 성품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성품이 유순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고, 인간의 성품 또한 육체적인 문제임을 생각하면 결국누구의 성품이 더 부드러운가?’로 다투는 싸움의 조건이 될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유순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대면하면 자신을 낮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의 행실을 두고 본다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 앞에서 한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도로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또한 육신에 따라 싸우는 자라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대면했을 때 유순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복음에 대해 어떤 자였는가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과거의 잘못이 약점이 되어 유순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긍휼을 입히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셔서 직분을 맡겨 영광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많다 해도 그들보다 더 낫다거나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순함으로 나타난 것이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을 때도 이 믿음으로 담대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을 때 담대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후 2:4절에 보면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로 인해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는 상태에서 교회를 떠나 그들을 대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로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담대했다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신뢰와 확신과 안심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문제 많은 교회를 떠나 있음에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3: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는 담대함의 근거를 주님이 우리의 도움이라는 사실에서 발견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이 부름을 받아 주를 알게 되고 믿음의 길로 가게 된 것에서 몸소 체험한 것이고 같은 시각에서 고린도 교회 역시 주의 도움 아래 있음을 알았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근심했던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구원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수를 말하면서도 모든 것을 육체를 기준으로 바라보며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 때문입니다. 복음이 기준이 되고 모든 것을 복음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교회가 육체가 기준이 됨으로써 복음이 가려지게 되는 것이 바울의 근심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원 문제가 아닌 복음으로 인한 근심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론만이 아니라 복음의 이론까지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이론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으로 머무른 복음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능력은 반드시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론으로 정지한 복음은 지식일 뿐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이론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울처럼 자신을 부르신 주 앞에서 굴복하여 낮아진 자가 아니라 복음을 알고 믿음이 있는 것으로 높아지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싸움에 있지 않은 것이 복음이 이론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 믿는다는 우리가 내가 높아지는 육신의 싸움에 열심이며 싸우는 무기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세상 것을 갖추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와 실력을 보여주고 내가 부각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육신에 따라 싸우는 헛된 싸움이라는 것을 바울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의 이유도 고린도 교회가 바른 신앙을 갖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서 교회의 이름을 높이는 것보다 복음의 증거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믿음을 세상에서 특별하고 우월한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은 특별하고 우월합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무시 되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특별함과 우월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싸우는 무기입니다. 결국 신자는 세상과 다른 싸움에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따라 육신의 다름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울도 특별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도 특별하지 않으며 모두가 자기 원하는 바를 따라 움직이는 악한 자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바울도 육신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는 이유로 육신의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행하면서 죄로 인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한탄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육신으로 행하면서도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육신은 언제나 그리스도 앞에 무너지고 굴복되어야 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는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는 우리가 서로 대면했을 때 유순하게 하고 떠나 있을 때 담대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힘 있고 가치 있는 것을 무기로 삼는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무기가 되는 이상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현실이 되고 실감 되는 그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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