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6 17:05

(62강) 열심과 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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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1-4

고후 11:1-4http://onlycross.net/videos/co2/co2-1101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설교>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1:4-5).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즉 성도는 창세 전부터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으로 인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도 됨을 내세워 자신에게 제기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면 왜 나는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한 백성이라면 바른 믿음의 생활을 잘하도록 도우실 것이고 힘든 문제가 있다 해도 낙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기며 주만 바라보게 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다르게 항상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하는 것 같은 자신을 생각하며내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맞나?’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경험하고 사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의 바울, 즉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상태였습니다(9:1).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는데, 그 공문의 용도는 만일 주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함이었습니다(9:2).

 

 

이처럼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살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누구도 주의 도인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던 바울인데 그러한 바울에게 갑자기 주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사도가 되기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고, 주를 핍박하는 일에 대해 회개하고자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의 도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사도가 될 조건이나 계기가 전혀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바울을 주께서 부르시고 그 부름으로 인해 바울이 사도의 길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기로 하셨다면 그 또한 창세 전에 이미 작정하신 일입니다.

 

 

1:13-15절을 보면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실 것을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작정하셨다면 바울이 주의 도를 따르는 자를 핍박하는 자로 자라는 것을 왜 두고만 보셨을까요? 좀 더 일찍 바울을 부르셨다면 주의 도를 믿는 자를 핍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의 일로 인해서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고 비난받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은혜로 해석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신 바울을 사도 될 조건과 자격이 전혀 없는 자로 만드시고, 오히려 사도가 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도움 되지 않을 행적만 있는 인물이 되게 하신 다음에 부르신 것을 은혜가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의 중점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나타나는 것에 있는 것이고, 그 은혜는 신자로 부름을 받은 인간의 각성과 변화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에게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1)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말이 자기 자랑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자기 자랑은 분명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자기 이야기는 자신이 행한 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것이었기에 어리석게 보이는 말을 한다 해도 참고 들어 달라는 의미로 나를 용납하라는 말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라고 말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열심을 고통받는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불러 모으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현재의 삶이 예상치 못한 고통 가운데 있다 해도 반드시 회복시켜주기 위해 일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인간을 위한 열심일 뿐입니다.

 

 

만약 열심을 그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낸 바울의 열심도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택한 자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평안과 행복과 기쁨으로 살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증거 하면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것을 바울의 열심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바울을 좀 더 일찍 사도로 부르셨다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복음 전파에 있어서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신다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열심보다 처음부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열심이 우리 입장에서는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중대한 오해고 오류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열심도 단순히 복음 전파를 위해 많은 여행을 했던 선교의 열심, 열정으로 오해하고 교인들에게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을 내어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9:6-7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한 아기, 즉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선함과 의로움에 대한 자기 열심과 행함으로 복과 구원을 얻겠다는 방식을 고수하는 인간에게 오직 한 아기로 인해 구원받는 방식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열심이 그 모든 것을 이루신다면 여호와의 열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를 부인하고 한 아기로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의의 행함만 의지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룬다고 하는 것은 한 아기로 인한 구원은 인간의 열심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열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지도 못하고 이루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게 됨을 깨닫고 그 믿음의 길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순순히 자기 열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항상 인간의 의와 선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면서 자기 열심으로 의와 선함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주께 인정받으며 복과 구원에서도 효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 대해 바울은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는 말을 남깁니다.

 

 

주께서 칭찬하는 자는 주의 의로움에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또한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중매에 대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열심은 고린도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합니다.

 

 

정결한 처녀는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결한 처녀를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열심이었는데 그것은 바울에 의한 바울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정결한 처녀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중매의 일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과연 정결한 처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는 정결한 처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자에게 남자는 힘이 되는 의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고 의지하는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의 신부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보이는 것을 힘으로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의 누구도 정결한 처녀로 일컬을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회를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54:1절에 보면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합니다. 도무지 노래할 수 없는 처지의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자식을 낳고 기뻐하는 여인의 노래와는 다른 노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면 낙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겪지 않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심과 슬픔에 있게 만드시고 노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54:4-5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수치 당할 자를 수치 당하지 않게 하시고 부끄러움을 볼 자는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남편이시다는 이것이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지 않고 구원되는 근거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창세 전에 이미 신부로 택한 자가 저주 아래 있는 수치 당할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남편으로서의 일을 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며 이 열심은 우리를 지으신 예수님이 남편으로 세상에 오셔서 저주받을 자인 신부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세상에 확실하게 증거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정결한 처녀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의지하는 것, 힘으로 품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우리가 정결한 처녀로 인정되는 것은, 우리 속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수치와 부끄러운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힘으로 의지했던 모든 것들도 저주에서 건져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들을 의지하는 자신에 대해 상한 심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수치와 부끄러울 것밖에 없는 나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은 남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이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는 일이었고 열심이었습니다.

 

 

이 일에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미혹을 받아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는 것이었습니다. 뱀의 미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 되는 것으로 하와를 미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4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자들의 미혹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존귀한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는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남편이라는 관계로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는가로 자신을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누리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만 남깁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세우시고 그리스도가 남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떤 현실에서도 충만이 되게 하시고 기쁨과 감사가 되게 하십니다. 여기에 추가될 가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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