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8 16:32

(31강) 강권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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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5:13-15

고후 5:13-15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1315.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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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죄 용서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은 것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십자가를 죄 용서와 구원이라는 기능적인 의미로만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인간 구원이 중점이 된 종교적 성격의 믿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바울의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모든 사람은 죽었다는 새로운 시각이 없이 십자가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초점을 둔 다른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죽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죽음은 우리가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을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은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받을 인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희미해지고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2:3-5절을 보면 바울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그렇다면 죽었다는 말은 예수 안에 있는 신자가 아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통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처럼 다가옵니다. 신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살아났다면 죽었다는 것보다 살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우리를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는데 계속 죄인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본질인 죽음을 건너뛰고 생명이라는 자기 구원에만 집착하는 것이고 이것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인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명백히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나 살았다는 것으로 즐거워하고자 한다면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연히 살려야 했고 죽은 우리가 산 자가 된 것 또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에 팽배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새로운 시각이 없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모든 것을 인간의 일, 인간의 책임으로 연결하여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는데 이것이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삽니다. 세상은 이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한 인생의 이치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을 살아있는 신자의 삶으로 제시하는 바울의 말은 뭔가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예수님이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를 살게 하신 예수를 위해 살게 하려는 것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위해서 다시 살게 하신 것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살아난 신자라면 신자는 나의 힘으로, 나를 위해서, 나의 인생을 산다는 사고방식이 벗겨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었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를 보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실감하고 느끼며 예수만이 생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예수로 인해 산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에 대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은 사실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왜 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죽은 자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과 함께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일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위해 살자는 말은 다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을 죽었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보지 않는 자들이 믿음을 흉내 내는 수준의 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면밀하게 살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듯 같지 않은 것이 성경을 흉내 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살아라는 말과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살아라는 말이 우리의 열심과 의지로 인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면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살게 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우리 일이 아니라 주께서 이루시는 주의 일로 부각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너희는 주를 위해 살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고 안되는 일을 주께서 이루신다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로 완성된 것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된 주님의 나라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이 주를 위해 사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사랑은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사랑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내가 아닌 예수를 위해 사는 길로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상식이나 지식, 양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주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열심으로 이루고 성취한 일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기존과 다른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로 말미암아 되어진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하고 이룬 것은 항상 부인되고 사라지는 것이 신앙 세계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자기를 위한 것이 없습니다.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온전하다면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을 이런 사람 되게 한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자기가 아닌 주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랑 아닌 사랑으로 왜곡되어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열심과 정성이 주를 붙들고 내 편이 되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열심을 다해 주를 믿고 정성으로 기도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응답하시고 복을 받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 의해 믿음의 길에 있게 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 인간의 것으로 인한 자랑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믿음의 내막에 눈을 뜬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으로 되었습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만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이끌어 가는 것이 현실임을 증거 하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믿음의 세계, 교회의 모습을 만들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하는 인간의 종교 세계라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 증거되면 자연히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믿음의 판단 기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는 주의 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에서는 서로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됨이 어떻든 그리스도의 사랑이 살게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사실이 서로에 관한 판단을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의한 신자의 선한 행실입니다.

 

 

따라서 행함은 인간이 인간에게 요구할 내용이 아니라 사랑의 강권을 받는 신자에게서 자연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내막을 알게 하는 은혜로 인해서 판단할 수 없는 인감 됨을 깨닫고 판단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결국 은혜가 행하게 하는 것이고 은혜로 인한 행함은 다만 주의 공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이끌어 가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의, 우리의 공로, 열심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의와 공로, 죽기까지 나타내신 주의 열심을 증거 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환영할 리가 만무합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빠진 믿음을 누가 인정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출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은 자신이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로만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는 것은 우리의 실천이나 자질과는 무관한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인간의 처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처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게 되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하는 자기 되게 하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자기를 위해 사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종교성과 상식에 맞는 기준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죽은 자가 만들어 낸 죽음의 흔적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간이 세운 기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 안에서 서로를 비방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주를 위해 살게 합니다. 우리의 의와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주의 의와 영광을 위해 살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로운 실천이 주께 영광이 되는 것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의를 증거 하라는 것이 우리를 살리시고 예수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께는 인간을 위한 것이 없으므로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일로 인해서세상일이 마음대로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비록 힘든 일이라 해도 우리의 헛된 꿈을 깨뜨리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혜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산다고 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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