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0 16:44

(37강) 사도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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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6:4-5

고후 6:4-5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0405.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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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설교>

신자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의지로 섬길 신을 선택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방식으로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영광되고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자 됨을 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존재의 시작부터 인간의 의지, 선택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중심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이 상실되어 있기에 성경을 인간의 복과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진리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심각한 오류와 폐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15:1절을 보면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라고 말합니다.

 

 

4:10-11절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인자와 진실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는 이유로 신자 아닌 사람보다 더 위대하게 되고 평안한 삶의 길로 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목적을 영광과 복이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공로가 되어 영광과 복을 받게 하는 보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언급되는 고난에는 자연히 관심 두지 않게 됩니다.

 

 

4,5절을 보면 바울의 고난의 형편이 언급됩니다. 많이 견디며 참아야 했던 형편이었고,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잘 수 없고 먹지 못해 굶주려야 했던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 된 바울이 겪었던 형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6,7)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난의 형편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끄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보다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6,7절의 내용일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8-10절의 내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라는 말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는 말에서는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말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됨이나 악한 이름보다는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말이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욕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무명한 자, 죽은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존재 가치의 향상보다는 오히려 낮아지고 무시 받으며 비난을 받게 되는 것만 연상될 것입니다.

 

 

반대로 영광, 아름다운 이름, 참되고, 유명한 자, 살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말에서는 사람들에게 칭송과 인정을 받는 가치 있는 존재로 높아지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서라는 목적에 부합되는 말이기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크림빵을 먹으면서 속에 들어 있는 달콤한 크림만 먹고 맛없는 밀가루 부분은 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크림을 먹기 위해 크림빵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고난은 맛없는 밀가루 부분이고, 영광, 아름다운 이름 등 후자의 것은 달콤하고 맛있는 크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크림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맛없는 밀가루는 버리고 달콤하고 맛있는 크림만 먹으라고 주신 것일까요? 달콤하고 맛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고 맛없는 것은 은혜가 아닌 것일까요? 크림빵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밀가루든 크림이든 빵 자체가 은혜입니다. 따라서 내 입에 맞는 부분만 따로 골라서 은혜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고난과 함께 주어진 은혜도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믿음의 삶을 우리가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면 여러분은 믿음의 삶을 어떻게 계획하고 세우시겠습니까? 삶을 힘들게 하는 고난을 계획에 집어넣겠습니까? 바울이 겪은 환난, 궁핍, 매 맞음 등의 고난이 있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식으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누구도 고난을 삶의 계획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고난은 없고 깨끗함과 지식과 오램 참음 등의 은혜로운 것만 있는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높이는 일에 고난보다는 은혜로운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에 대해 확고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모든 관심이 오로지 자기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주도하시고 이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내용이 인간 위주로 해석되고, 하나님도 인간을 도우시는 존재로 곡해됨으로써 교회가 사탄의 속성이 난무한 저주의 현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후 5:15절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에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고난을 원하고 고난이 있는 길로 가지 않기에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방식으로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환경의 차이를 두고 좋고 나쁨을 따지며 복의 여부를 저울질할 수는 없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인간 위주로 해석한 사탄의 속성일 뿐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말을 따라 참된 하나님의 뜻을 하나하나 짚어가게 되면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오류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자신이 오류투성이 존재임을 자각하고 모든 삶에서 확인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십자가에서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다 이루신 완성의 의미와 은혜를 감사하고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하게 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하고 자기를 위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인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내용이 달갑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나도 신자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염려와 불안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고난은 싫다는 기본적인 본성이 고난을 밀쳐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감사하는데 정작 자신은 고난과 상관없는 길로 가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은 구원의 의미보다는 신자라 자처하는 우리가 얼마나 자기 육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가를 알게 하는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보게 되는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구원으로 좋아하기보다는 육에 속한 저주의 존재를 생명에 속한 영의 존재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난을 근거로 해서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죄를 알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사도의 고난 역시 여전히 육신에 머물고자 하는 우리의 죄와 무능력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를 고난받는 자로 세상에 나타나게 하시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의 고난을 사도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것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기에 당연히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는 것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힘들어지고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5: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에는 인간이 의로운 것으로 자랑하고 높이는 육신의 모든 것이 구원에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누구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의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믿는다고도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의의 행함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믿음의 길에서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탄의 심성에서 나오는 행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뜻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계획에 없었던 고난을 겪게 되면 그동안의 교회 생활로 자신을 의롭게 포장하고, 마치 고난이 하나님의 공평하지 못한 일인 것처럼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는 예수를 믿은 것도 십자가를 아는 것도 아니었음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참고 견디면 원하고 기대하는 복으로 보상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교육이나 훈련 과정이 아닙니다. 만약 고난이 그런 의미라면 과연 고난을 통해서 원하는 복을 보상으로 받을 자가 있을까요? 우리는 고난을 견디고 이길만한 실력자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직하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난에 직면한다 해도 하나님이 주는 연단이라 생각하고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만 낱낱이 발각될 뿐입니다.

 

 

고난에 대한 사도의 말에서도 우리의 마음에는 고난 없는 평안한 삶에 대한 기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그 기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가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환난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인간이 왜곡하여 조작한 종교의 세계인 것입니다.

 

 

고난은 단순히 고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으로 인해 심적으로든 육적으로든 힘들고 고통을 겪는 것은 맞지만 그러한 고생을 위해 고난이 동원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고난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모든 주도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고난이라는 원하지 않는 길로 가면서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면 구원받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난에서도 여전히 자기 것을 확보하겠다는 욕심일 뿐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인내, 연단, 소망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세계에서 자기 것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왔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원수로 활동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이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자임을 직시하게 되면서 예수께 끌려 나오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선택되고 부음 받은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것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의 헛됨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조성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모든 삶에서 진심으로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환난은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되어 세상이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고생스러운 환경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이 고난을 환경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편안이라는 조건에서는 고난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면서 모든 삶을 주도해 가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신의 고통과 무관하게 신자는 고난에 참여한 자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에 참여된 신자로 무엇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뜻을 이루고 내 이름을 위해 부름받은 인생이 아님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조성하신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됨을 나타내야 할 운명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는 세상의 것은 없다 해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 되는 그런 신자 됨에 마음을 두자는 것입니다.

 

 

사도에게 사도를 위한 인생이 없는 것처럼 신자에게는 신자 자신을 위한 인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내가 원하는 나의 인생을 꿈꾸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습성을 버리지 않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부르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천국의 백성, 신자의 인생으로 보게 된다면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 없이 편안하게 사는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일까요? 많은 기독교인이 편안하게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것이 자기 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저주받은 자의 실체일 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신자는 죄의 세상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아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나타낼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죄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임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붙들린 기쁨과 복됨을 배우라고 죄를 범하는 우리의 실상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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