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3 16:56

(39강) 두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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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6:8-10

고후 6:8-10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081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설교>

예수님이 개입하신 인생을 사는 신자에게 자기 인생은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탄탄한 자기 인생을 위해 예수를 찾는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의 뜻으로 이끄시는 삶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영광을 경험하고 고백하며 증거 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 이름하는 존재에 대한 복음의 시각이고 해석이기에 신자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신자는 성경이 증거 하는창세 전에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신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종교인입니다. 이러한 종교인을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신자로 사는 것과 이름만 기독교인이라 하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다르며 현실을 보는 눈 또한 다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가진 신자의 말은 똑같이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가진 신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두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8)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영광이라는 현실과 욕됨이라는 현실, 악한 이름을 얻는 현실과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현실, 속이는 자로 드러나는 현실과 참된 자로 드러나는 현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현실을 말합니다.

 

 

세상의 현실관도 크게 둘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 성공과 실패, 평안과 재앙, 기쁨과 슬픔, 이처럼 두 현실관이 있고 우리는 당연히 부자, 성공, 평안, 기쁨 등등의 현실을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이뤄주기 위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아닌 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인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실을 들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으로 인해서 자신이 추구하고 꿈꾸었던 현실관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참된 현실에 대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복음에서도 멀어져 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과 똑같은 현실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두 현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종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종교의 세계에서 자기 뜻에 응답해줄 하나님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예수님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고, 결국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종교 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두 현실을 말하는 것일까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9,10)라는 바울의 말에는 두 현실이 있습니다.

 

 

두 현실은 모두 바울의 실제 현실입니다. 다만 세상이 평가하는 것과 바울이 받아들이는 현실이 다릅니다. 세상이 볼 때 바울은 전혀 알아주지 않는 무명한 자와 같습니다. 죽었다고 할 만큼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될 만큼 인생 자체가 고난입니다. 분명 근심하리라 생각되는 형편이었고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 해당하였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4,5)라는 말에서도 바울의 형편은 인생의 실패,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현실을 유명한 자. 살아 있는 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자, 항상 기뻐하는 자,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말함으로써 세상의 현실관을 뒤집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바울의 현실관을 인정할까요? 당연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기 현실은 모두 세상 기준과 시각에서 어긋나 있으며, 무엇보다 눈으로 확인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실은 재벌인데 허름한 옷을 입고 고생하고 다니며 재벌의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이라면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다거나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없는 자 같으며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무명한 자, 징계를 받는 자, 가난한 자 등의 현실은 자신의 진짜 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이고 꾸민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였고 교회도 바울을 무시하고 비난할 정도로 무명한 자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유명한 자,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현실이 오히려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허풍으로 간주 될 여지가 많다고 할 것입니다. 마치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취급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바울과 같은 시각에서 자기 현실을 말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본다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달리 기대하고 원할 믿음의 보상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이미 보상은 채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실에서도 하나님께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넉넉함과 여유가 드러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살지 못합니다. 바울처럼 어떤 형편에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의 현실을 살 자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말은 그저 이상적인 신앙생활로, 사도 한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뤄주실 미래의 현실로 기대하며 기다려야 하는 문제입니까?

 

 

지금은 무명한 자로 살게 하지만 나중에는 유명한 자가 되게 하고, 지금은 가난한 자로 무시 받으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지만 나중에는 부요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자기 현실을 그렇게 미래적인 것으로 기대했을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사도가 아니며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라는 고백 또한 성령에 의한 바울의 심정이 아닌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자 하는 꾸며낸 거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현실관에서 바울의 말을 듣게 되면, 바울은 힘들고 어려운 현재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지기 싫어서 자존심만 세우려고 하는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난이라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가난이라는 형편, 하나님이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육체에 가시, 즉 병이 있었던 상황(고후 12:7)들을 자신이 처한 참된 현실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시각, 현실관이 세상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이 알지 못한 다른 현실을 살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세상이 이해하는 현실과 바울이 이해하는 두 현실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이 바울의 현실로 간주한 것은 그저 눈에 보이고 바울이 몸으로 겪은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여 간섭하시는 참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건 안에서 봐야 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본래 하나님과 원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현실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관계에서 살아가는 현실과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들의 결말은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에 사실 땅에서의 현실은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3:18,19절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땅에서 인생이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의미를 두고 삽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자들의 마침은 멸망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깜깜합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의 멸망을 생각한다 해도 여전히 땅에서의 좋은 인생이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땅과 하늘 양쪽 모두에 마음을 두고 다 자신의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두 현실은 현재를 살아가는 세상과 미래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천국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두 현실 모두에서 성공하는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믿음은 두 현실을 자신의 소원대로 성취할 수단과 통로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3:20-21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땅에서 살지만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속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늘에 소속되었기에 땅의 일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요를 판단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사는 인생을 가르치기 위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본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은 부자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마음이 부자 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없는 자이지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마음의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음이 부자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부자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행복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재물이 주는 행복은 자신에게는 없는 현실로 간주하고 재물이 아닌 현재의 다른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인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은마음은 부자다. 마음이 부자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는 것은나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들의 마침 역시 멸망입니다.

 

 

바울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7)라는 말 대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고 능력 안에 있는 자신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에 보이는 땅의 일로 판단할 수 없는 현실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핍박도 고난도 욕을 먹는 것도 가난한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2:5절에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해 자기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자기 방식에 믿음을 얹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 1:23,24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인생을 꽃처럼 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인 원수로 십자가 앞에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말에서 다시 실감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우리는 항상 반대하는 자로 나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씀드려도 언제나 세상에서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자로 드러나는 자기 뜻을 고집합니다.‘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말에서도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자로 사는 인생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회피하는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바울이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그런 신자 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몸으로 겪으며 살아가는 현실을 현실로 여기지 않고 천국만 생각하면서 자신을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여기는 신자 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웃고 우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현실관으로 살아가는 실체로 드러나는 것만 실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믿는 신자 되겠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보이기 위해 힘든 처지에서도 힘들지 않은 척해야 하는 부담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신자 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고 실패하는 현실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실제 현실로 다가오고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서 바울의 현실관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내가 모든 것을 가진 신자답게 사는가?’그런 문제에는 마음 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받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이 생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드시고 이것을 위해 인생에 개입하여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는 땅의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 안에서 함께 한다면 서로에 대해서도 세상과 같은 시각으로 판단하고 저울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고 마침은 멸망입니다. 이것이 확정된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서 십자가를 보게 되면 참된 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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