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3 15:52

(24강)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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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26-29

갈 3:26-29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262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설교>

성경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해석이 그리스도의 피를 증언하는 복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근거로 한 해석이라는 것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예수, 십자가, , 용서, 은혜 등등의 단어가 조합된 말이라고 해서 십자가를 근거한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공로와 의는 십자가를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받으시고 자기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는 우리가 용서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음을 증거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의를 세우는 신자 될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와 의로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것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며 그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 될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근거로 한 성경 해석은 인간이 추구하는 공로와 의를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만들어지는 공로와 의가 믿음으로 인정되는 십자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수시로 십자가에서 벗어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는 삶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계속 미련을 둡니다.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삶이 믿음 있는 신자다운 모습에 어울리는가를 자기 기준과 안목으로 살피면서 자기를 평가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벗어난 인간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서 선하고 옳은 것을 찾고 그것으로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이 십자가 밖에 있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돼라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선한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선한 행위가 있는 자를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선악 개념 위에 구축된 인간의 상식과 사고에 일치되기에 아무 의심도 없이 성경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으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즐거워하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에 함께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의를 행할 수 없고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는 자로 규정하는 십자가는 버리고예수의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셨다는 것만 말하는 구원 용도의 십자가로 조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조작된 십자가는 말씀을 실천하는 인간의 열심과 찰떡궁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26절에서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한 구절의 내용만으로도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인간에 의해 조작된 거짓이고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세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뜻과 의지와 열심을 동원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도록 믿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하나님으로 맺어진 열매만 있을 뿐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열매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함께 한다면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나타난 열매만 있는 상태로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교회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안에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에게내가 신자답게 사는가?’의 여부가 의미 있는 중요한 문제로 자리할까요?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자답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신자다운 것으로 인정하는 모습으로 십자가를 통과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정하고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떤 것이라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저주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소홀합니다. 인간의 선함이 하나님께도 선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50절에 보면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 21:31절에서는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운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버지 뜻대로 하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으로 짐작해 버립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처럼 착하고 옳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한다고 자신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게 세리와 창녀는 언제나 무시와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로 규정합니다. 바울의 말에 빗대어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여러분께 불편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심중에 그려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 성도 됨은 선한 행함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녀에게는 선한 행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행함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선악 기준입니다. 결국 바리새인의 사고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을 통해서 드러나는우리의 선한 행함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중에 그려져야 할 하나님의 아들 된 모습은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라는 말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행함에 열심이 있고,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칭찬받고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게 된다면, 그러한 사람으로도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공로와 의로움에 가치를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의의 행함이 불가능한 인간의 무능으로 인한 절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의를 힘으로 의지하는 믿음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세리와 창녀는 그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아들로 불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행함과 연결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 또한 행함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신자라는 존재가 믿음의 행함, 선한 행함이라는 것으로 확인되거나 증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신자 됨을 인간의 성품과 행함으로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성품과 행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 됨은 사라지고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며 개별적인 관계로 구성된 교회 아닌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28절을 보면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라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은 통일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개별적 가치를 자랑하거나 높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무엇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교회는하나의 관계를 무척 강조하지만 하나의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인이 서로 다투고 화합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렇다면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라는 바울의 말은 거짓이 됩니다. 인간은 지금껏 시기와 다툼이 없는 하나 됨을 이룬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은 신자가 함께한다 해도 시기와 다툼이 없는 하나 됨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처럼 믿음에 율법을 더했을 때 율법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율법 안에서, 즉 우리의 행함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행함을 같은 가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함의 비중과 정도에 따라 그 가치 역시 다르게 저울질하기에 율법, 행함이 더해진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십자가를 근거로 한 해석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하여 허물이 없고 깨끗한 신자가 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가치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변하지 않는 일관된 하나님의 구원에 머물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머무는 신자라면 자신의 선한 행함 따위에 미련 두지 않습니다. 저주 아래 있던 자에게 입혀진 그리스도라는 옷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되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옷은 지체마다 각기 다르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체가 같은 옷을 입었기에 교회 안에서는 다른 조건에 따라 높고 낮은 구별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봉사와 수고가 다르다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자격이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나에게 입혀진 그리스도라는 옷이 소중하다면 서로 다른 봉사와 수고를 한다 해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으로 하나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입니다.

 

 

3:3-5절을 보면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성품이나 행함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다고 생각되면그렇게 살면서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며 자기가 자기를 지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귀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좀 더 바르게 살아서 신자다움을 갖추고자 하는 결심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스가랴서에서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말합니다.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깨끗함을 입게 되는지의 내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손수 만들어 자기를 가린 옷을 벗기고 가죽옷을 입히신 일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신자는 더러운 옷을 벗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손수 갈아입을 수 없습니다. 옷이 더러워도 더럽다고 느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깨끗하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오류입니다. 선한 행함을 깨끗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자신이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데도 자기 행함으로 치장하며 내 옷이 더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신자는 단지 열매일 뿐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에 의해 맺어진 열매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열매는 스스로 되지 않습니다. 나무가 원인이 되어 열매라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나무를 가리키고 나무를 증거 하는 용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된 신자로 함께 합니다. 그 말은 신자는 서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열매로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지적 받아야 할 대상이 없습니다. 더러운 옷을 벗기고 그리스도로 옷 입히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우리를 부족하다고 할 것이 없는 완성의 세계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성의 세계입니다. 완성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믿음에 부족함을 느끼면 예수님으로 인한 평강은 사라지고 부족을 채워야 한다는 조바심만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입혀진 옷은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하나 된 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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