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4-5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0405.mp4
<본문>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설교>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의 행위라는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은 복음이 증거 하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인간에게는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문제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율법의 행위라는 말에 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0:2-4절을 보면“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행위는 없다는 뜻입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의로운 것으로 인정되어 복과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종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로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의 의를 세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엡 3:18-19절을 보면“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충만이 되십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생명에 속하게 하시고 거룩한 성도로 여기시는 사랑에 의해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자로 존재합니다. 심지어 그 사랑은 끊어지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아가서를 통해서 듣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사랑이 충만이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신자는 자신이 채워 넣어야 할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주일성수, 십일조, 절기 등을 지키는 것으로 믿음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사랑을 우리의 충만으로 말하는데도 내가 행한 내 것이 없으면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과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골 2:16-17절을 보면“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림자에는 실체가 있어서 그림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움직임을 따라 나타납니다. 따라서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 등이 의미하는 그림자인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절기, 초하루, 안식일만 율법이 아닙니다.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등의 십계명 또한 율법이기에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실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말은 십계명도 지켜야 할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체인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 실체인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제사, 제물, 제사장 등도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인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림자를 지키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율법을 믿음의 열매, 증표로 여기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경의 내용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성에 충실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는 말로 2절의 물음을 반복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이 됩니다. 이것을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지 듣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지 묻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행하신 일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면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 28:1절을 보면“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 28:15절에서는“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축복과 저주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취지는 인간에게 복을 주기 위함일까요?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함일까요?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롬 3:20).
그리고 갈 3:10절에서도“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말한다면‘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까지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율법에 기록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을 누가 지킬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자기를 의롭게 하고자 하는 자들은 십자가가 아닌 율법에 속한 것이고 그것을 저주 아래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을 저주에 속한 자로 간주하고 율법의 완성이 되는 십자가를 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인간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만 말한다면 누구든 자기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믿겠다고 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는 인간이 선함의 의미를 두는 모든 행위를 무너뜨립니다. 믿음도 죄인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말함으로써 십자가를 믿게 된 것이 성령이 오시고 내 안에서 능력으로 행하신 일의 열매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생산할 수 없는 믿음이기에 이 믿음을 받은 신자라면 율법의 행위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4절에서“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는 말로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의 행위를 받아들인 것을 두고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지 않았다면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는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받았다는 많은 괴로움은 외부의 핍박이나 환경으로 인한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괴로움과 율법의 연관성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헛되냐?’라고 묻는 것은 괴로움이 주는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를 바르게 알았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괴로움을 말하는 것일까요?
1절을 보면“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고 우리가 죄의 존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은 저주받은 죽음의 존재입니다. 숨을 쉬며 살아서 일하고 활동하는 것이 보이는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이 진정한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선함과 의로움도 죽음의 문제에서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것을 죄와 죽음을 통해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를 괴롭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것은 곧 자기의 죄를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죄가 주는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를 보지 않는 사람들은 죄로 인한 괴로움이 없습니다. 죄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사고방식으로 죄를 이해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 성실하고 양심 바르다는 것으로 죄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의를 더욱 쌓기 위해 율법의 행위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고 질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고 구분하면서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는 것을 의로운 것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따지고 판단하고 구별하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을 믿음에 어울리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롬 3:20절을 보면“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롬 5:21-21절에서는“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저주 아래 있는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알수록 죄의 무거움이 더하여지고 죄로 인한 괴로움 또한 더해집니다. 따라서 괴로움이 헛되지 않는다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바울의 말대로 십자가의 은혜로 마음이 향할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면 율법의 행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의로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무엇 때문에 행위에 미련을 두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행위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구원의 조건을 행위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기독교의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교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인의 행위는 곧 교회의 성장으로 직결되는데 행위가 게을러지거나 사라지면 교회 성장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게 만들기 위해 주일성수라는 법을 만들어 지키게 하고 구약의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하면서도 돈과 연결되는 십일조와 맥추절, 추수절 등의 절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의 현실로 본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사탄에게 장악되어 끌려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3절의“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말대로 성령과 육체는 공존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육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육체의 행함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육체의 행함을 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가였던 바울이 성령을 받고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복음을 듣고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갈라디아 교회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땠을지는 그의 서신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갈라디아서를 모르지 않을 교회가 믿음의 실천, 행함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교회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고 복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행함보다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에 힘을 쏟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의 존재 이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십자가로만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의 교회, 인간의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의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만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성령으로 나타나기에 지상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이 보게 하는 십자가는 보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보이겠다는 자들 또한 성령을 받은 거룩한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보게 되고 알게 된 것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는 것이 신비고 기적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음과 믿음의 신비와 기적을 인간의 선한 행함으로 보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여주는 것은 죄입니다. 죄 말고 보여주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우리 자신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괴로움이 있게 되면서 십자가의 은혜로 마음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신자는 자기 일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