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1:11-17http://onlycross.net/videos/gal/gal-011117.mp4
<본문>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설교>
성경을 보면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 다윗을 비롯하여 여러 선지자가 그 대상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약 시대에는 아무래도 사도 바울을 본받고 싶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선교에 뜻을 두고 있다면 바울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받고자 하는 대상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업적과 믿음의 행함으로 인정하는 일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사도보다도 많은 업적과 믿음의 행함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는 바울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어느 기독교인이 가룟 유다와 같은 인물을 본받고자 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가 성경의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것도, 자신 또한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울을 본받고자 한다 해도 바울의 삶을 그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의 삶까지 그대로 본받겠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국 바울의 업적과 능력에만 눈길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성경을 이러한 시각으로만 봅니다. 그래서‘누구를 본받아라’라는 말을 당연한 듯합니다.
물론 바울도 빌 3:17절에서‘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복음에 대한 열심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 14:15절에 보면“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자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출처는 예수님이지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출처 또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가 있게 되는 기적도 인간과는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일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은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바울을 본받자고 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믿는 자가 있게 된 일의 출처를 바울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헛된 일입니다. 바울의 사도 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복음의 출처를 인간에게 두었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한 일에 열심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의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이“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출처를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출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바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도라 해도 그가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아니라 사람으로 말미암은 복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음을 전하든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에 따라 복음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 1:12)라고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 파벌이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고 복음의 출처 또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입니다.‘누가 복음을 잘 전하는가?’‘누가 더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가?’‘누구의 복음이 더 능력이 있는가?’라는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차별을 두고 더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의 말은 자칫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내가 전하는 복음만 진짜다’라고 주장하는 말로 들을 수 있고‘복음은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는 말은‘그러면 당신은 무슨 이유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가? 바울 당신에게 복음을 배우지 않아도 계시로 받으면 되지 않는가?’라는 반발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고 배웠다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계시로 말미암은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설령 바울이 예수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고 배웠다 해도 그것 때문에 당연히 예수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가르치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외면한 것도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들었는지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에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듣고 배웠든 복음을 깨닫게 하고 십자가를 믿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평생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복음이기에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계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롬 10:14-15절을 보면“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사실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전하는 사람이 없이는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보내신다고 말하면 누구나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전하는 사람이 없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을 주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받는 순서로 이해하게 되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듣고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전도를 거의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도에 중요성을 두면서 전도하는 것을 예수님이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가치 있는 덕목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전도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 마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것이 고민이 되는 기독교인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6,17)라는 말을 이어서 합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다 해도 다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복음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관자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믿게 하셨기 때문이고 믿게 되는 것도 예수님이 복음을 듣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을 전하는가와 상관없이 믿는 것은 전적으로 주께서 일하심으로 되는 것이기에 믿음을 내세워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믿음의 공로는 주께로 돌아가야 할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한 보내심을 받은 자를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신 선교사와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 4:43-44)라는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았고, 따라서 전하고 듣고 믿고 주를 부르게 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복음에는 인간이 일조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복음이고 믿음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살인강도를 저지른 사람이고 교회를 핍박한 원수라 해도 그것 때문에 복음이 훼방 되거나 복음 전파에 지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시비를 걸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까지 의문을 품는 것은 복음의 주관자가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복음의 출처가 그리스도라는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결국 모든 공로를 자기들에게 돌릴 것이고 바울은 그것을 다른 복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복음에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울과 생각이 같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울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인간을 개입시키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처럼‘바울 당신 예수를 핍박한 나쁜 사람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바울의 말대로 복음을 예수님만이 일하시는 영역으로 간주하고 인간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바울은 복음의 주관자로 일하시는 예수님의 열심을 나타내는 생생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보면서 교회를 핍박했던 인간성까지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고‘주가 일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그가 바른 복음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으로 말하면서 자신이 행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예수를 알기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 뒤에 이어져야 하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뉘우침과 회개의 말이 아닐까요?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멸했던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 된 지금은 사도가 되어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에만 초점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15절에서“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는 말대로 바울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신 이가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주관하시는 분에 의해서 있게 된 자기 변화를 말함으로써 복음에 속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듣고 배운다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믿게 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실력인 것처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아는 그가 바른 복음에 있는 신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든 성도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예수께 속한 것이 사도이고 성도인데 우리 마음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되는 것도 성도 되는 것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가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핍박했다는 이유로‘너는 사도 될 수 없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되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바울의 말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이 강해지기를 바라는 것도 예수님을 복음의 주관자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허망하고 헛된 탐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복음을 안다 해도 복음이 증거 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주의 길에 있는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은 같습니다. 사람이 다르고 말하는 내용이 다를지라도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하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을 말한다면 같은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복음에 있는 관계를 두고 형제라고 합니다. 바울을 사도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답다 하고 바울을 높이고 바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그리스도가 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른 복음에 있는 신자입니다.
주께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약속의 복음에 이끌리며, 의지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