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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1:18-24

갈 1:18-24http://onlycross.net/videos/gal/gal-01182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설교>

믿음에 관한 기독교인의 생각은 열심히 바르게 잘 믿어야 하는 것으로 일치됩니다.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믿으라 하고 죄의 유혹을 이기는 강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여러 말들을 하지만 모두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위하고 인간에 의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보면 다 같은 말이며 같은 믿음입니다.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 것에도 바른 믿음이 복과 구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진심으로 바른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믿음으로 야기 되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심각한 사태일까요? 그것은 바르게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이 실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던 우상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믿는 것인데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유대교를 믿고 조상의 전통에 대해 열심을 내는 것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조상의 전통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예수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 믿는 자를 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유대교와 조상의 전통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참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유대교와 조상의 전통에 대한 열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며 열광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믿음으로 알았는데 헛된 일로 끝난다면 말씀드린 것처럼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을 바쳐 수고한 열심이 모두 수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 열심의 헛됨을 알게 하는 복음을 용납하지 않은 채 자기 열심에 매인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을 때 바울은 믿음을 자신의 소관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의 열심히 자신의 행함과 실천으로 나타내고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믿었던 유대교입니다. 그러면 이런 유대교가 유대인들의 종교로 국한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열심을 강요하는 지금의 기독교가 유대교의 본질을 그대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 또한 유대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다르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믿는다고 생각하는 예수가 바울을 찾아오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그 예수가 아니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명칭은 기독교고 표면적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본질은 유대교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대교의 믿음과 참된 기독교의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믿음의 주관자를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대교를 믿었을 때의 바울은 믿음을 인간의 소관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율법을 잘 지키고 실천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답게 되고 의를 이루라는 뜻으로 제멋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인간을 믿음의 주관자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알았고 그것을 믿음의 증거와 의로움으로 나타내고 자랑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박해하고 멸하고자 했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에서 믿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원하고 작정함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믿음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의 행함과 실천을 도구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가 어떻게 복음의 증거물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가에 대해 증거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2-24)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얼굴로는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유대의 교회들이 바울의 얼굴을 몰랐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바울이 행한 일로 바울을 알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려고 했던 일도, 멸하려고 했던 복음을 지금 전하고 있는 일도, 눈에 보이는 그 일을 보고 바울을 알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을 얼굴로 알았다면 바울과의 관계에 따라 판단이 갈렸을 것입니다. 바울을 반대한다면 갈라디아 교회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일만 내세워 바울이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게 됩니다. 반대로 바울을 옹호하는 편에 있다면 교회를 핍박했던 일보다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사도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을 보고 아는 것이고 그렇다면 바울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바울을 옹호하고 바울 편을 든다고 해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의 교회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바울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등 많은 성과를 보인다 해도 그것을 보고 바울을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나타나는 복음의 모습이기에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습성은 사람을 얼굴로 아는 것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이 헛되다는 것을 하나님의 택정과 부르심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굴로는 부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이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택정과 부르심으로 거룩한 신자 되었음을 알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얼굴로 아시고 부르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삼상 16:7절을 보면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기름 부을 자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말라 하시면서 인간이 사람을 보는 관점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보시고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중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선에서 선하고 의로운 자로 판단되어 나설 자는 없습니다. 비록 외모는 선하고 의롭게 보이도록 치장할 수 있지만 중심은 무엇으로도 치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모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도무지 거두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너는 안되지만 나는 된다라는 구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을 외모에 두면서 은혜로 부르심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어떤 오류 가운데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것이 심각한 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위험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려던 자를 그냥 불러서 사도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택정이 부르심으로 성취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개입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용서 없이 무작정 택정 하셨다는 이유로 불러내시고 사도 되게 하시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용서는 말 그대로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한 모든 사람을 불러내어 천국으로 들여보내면 아주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택정과 부르심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인한 용서 안에서 부르심이 은혜의 부르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자신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자신이 멸하고자 했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되게 하신 용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고, 십자가의 용서를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와 근거로 삼았기에 십자가의 공로만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유대의 교회들도 하나님이 십자가의 용서로 자신들을 부르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그리스도 안에 있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교회라면 이들도 이전에는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모든 일의 중심에 십자가의 용서가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멸하려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바울도 자신들처럼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일의 결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 십자가로 나타난 용서의 능력만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능력을 믿고 자랑하는 것이 복음으로 증거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행적만 따지는 것은 자신들조차 용서의 능력을 입은 자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교회 현실을 갈라디아 교회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규모와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선한 사업 등으로 얼굴을 가꾸고 자기 자랑으로 삼는 것들이 외모를 바라보면서 용서의 능력은 무시해 버리는 현실이 그러합니다. 자신을 외모로 알기에 다른 사람 또한 외모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를 정확하고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비추어서 도무지 합리적인 말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대충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용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장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용서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심판이 마땅한 죄인의 자리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파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을 얼굴로 알고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멸하려던 그 믿음을 전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복음의 능력이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제시할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들을 보면서바울이 대단하다라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으로 감탄해야 합니다.

 

 

도무지 구원될 가치가 없는 바울 같은 사람을 예수의 피로 용서하시고 은혜로 불러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 하심이 감탄과 놀라움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실감하고 신자 된 우리 또한 복음의 능력이라는 현실에 있으므로 감사하며 용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보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은 주께서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깊고 악한 죄까지 극복하시고 이기심으로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말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불만도 결국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 남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수 있는 얼굴 되는 것에 관심을 두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사라지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5:39절을 보면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수록 우리 안에서 확실하게 되는 것은 행함의 무가치함입니다. 어떤 일을 행했든 자랑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용서의 능력이라는 이 사실이 복음에 의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의 죄인 됨을 확실하게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영원히 저주에 속한 자가 될 뿐임을 알게 하시고 복음만 바라보고 자랑하게 하는 것으로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비현실인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말은 예수님이 일하신다고 하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함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와 선행을 믿음이 역사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일하심으로 맺어진 열매로 간주하고 자기 행함을 보며 좀 더 현실적인 믿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이라는 현실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보고 알 수 있는 현실이 아닐 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만이 깨닫고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바울을 보면서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현실임을 배우게 됩니다. 용서와 사랑이 참된 현실이기에 서로를 얼굴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아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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