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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6-10

갈 3:6-10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061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설교>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 기준과 원칙은 믿음입니다. 이것은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6,7)라는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은 믿음 때문이지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믿음 외의 것을 가지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 기준,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다른 믿음, 다른 복음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 해도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조작된 유사품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한 기준과 원칙으로 제시하는 믿음 외의 것은 행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함을 믿음 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인간이 행하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단단한 생각에 붙들려 행함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하는 것이 교회의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삼는 성경 중의 하나가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0-22)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행함과 믿음을 하나로 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에 말하는 행함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행함과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교회가 강조하는 신앙생활도 아니고 율법을 실천하거나 도덕적인 행함이 아닌 다른 행함을 말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말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어떤 행함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은 율법과는 무관합니다. 아브라함 이후에 주어진 율법에는 아들을 제단에 바치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생활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의 행함은 달리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교회를 다니고 예배하면서 기도와 헌금 등의 행위가 있으면 믿는 것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그리고 행위의 정도를 따져 믿음의 성적을 매깁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그것과는 아예 다릅니다. 결국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속고 있는 것이 지금 기독교인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정하셨다면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어야 아브라함처럼 의로 정하심을 받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른 믿음으로는 의로운 자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은 것일까요?

 

 

15:5-6절을 보면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전의 일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바치는 행함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의해 이삭을 바치는 행함이 나오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행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고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말은 맞습니다. 믿음이 행하는 것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생각했다면 제물로 바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삭을 제단에 바치면 자손은 사라질 것이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는 약속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간적 생각과 판단이 앞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었기에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함은 믿음 좋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실천하는 순종이 아니라 믿음이 행하는 행함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인정받은 근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하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아들을 바치는 행함이 있기도 전에 믿음이 의가 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율법의 실천이 있는 믿음을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오류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도 행함에 매달리고 행함이 있어야 참된 믿음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교회를 출입하면서부터 열심을 요구받습니다. 열심이 있는지 없는지로 믿음을 평가받으며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도 나의 열심을 보시고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 내가 잘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행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믿음, 그런 복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도 다르며 따라서 그런 믿음은 의가 되지 못하고 당연히 천국과는 무관하다는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율법을 믿음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무거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다루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믿음으로도 의로운 자로 인정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믿음의 기준으로 세우게 되면 오히려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어리석다는 질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은 믿음입니다.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이라 할지라도 이 기준과 원칙이 적용되어 오직 믿음으로 의가 정해집니다. 이것을 성경이 미리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기준과 원칙인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나타내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음은 약속입니다. 12:2-3절의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하신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하신 복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이 되는 요건으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대하게 하신 아브라함의 이름이 복이 된다면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복의 기준과 원칙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름만이 구원이 되고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 앞에서 인간의 이름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런데 창 17:4-5절을 보면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의 이름을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언약으로 고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룰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언약이며 이 언약에 의해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는 자들은 인간의 조건과 가치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하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성취로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으로 인정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육신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포피를 베는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신 것도 언약을 지키는 믿음은 육신의 조건을 거부한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4:17절을 보면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으로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기에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이라고 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야고보의 말은 바울의 말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매이고 자기 행함에 매인 인간의 한계입니다.‘믿음만 말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잘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함으로 옳고 그름이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행함만이 의가 됩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의로운 것으로 인정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가 정해질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열심에 초점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로 증거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만 모든 마음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랑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리고 헤엄쳐야 할 믿음의 세계입니다. 나의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러한 관심은 불안과 염려만 조장할 뿐이며 그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착함과 열심과 앎을 근거로 자기 믿음에 대해 안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다면 다시금 성경에 무엇을 말하는지 깊고 면밀하게 살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착함과 열심과 앎을 근거로 스스로 인정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10절을 보면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롬 4:15절에서는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율법 행위에 속했다는 것은 믿음을 율법의 행위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당연히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고 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칭찬받을 착함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저주 아래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또한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다는 말은 율법이 있는 곳에는 범법이 있을 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 해도 결론은 죄를 범하는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일을 항상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행위에 속하고 율법이 있는 곳에는 진노와 저주만 있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로 채워져야 믿음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로 채워지고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만 믿게 합니다. 우리가 몸담은 기독교의 현실은 어디를 가도 행위의 강요와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열심히 믿고 실천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러분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하신 그 믿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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