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1 16:02

(18강) 나무에 달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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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3:13-14

갈 3:13-14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13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 죄를 대신하시고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얻었음을 믿으며 예수님의 고난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십자가 신앙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복이 되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기모순을 깨닫지 못합니다. 애초에 십자가를 자신의 죄 용서와 구원을 위한 것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가짜 십자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십자가를 말하면믿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에 힘쓰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기독교인의 본분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고 현재에서는 죄를 이기며 신앙생활에 힘쓰는 것을 십자가를 믿는 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며 십자가만 고집하는 바울의 믿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여러 가지의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율법의 실천으로 증거된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누군가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구제를 참된 신앙의 행태로 강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각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으로 신앙을 확인합니다. 구제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구제의 행위로, 선교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선교의 행위로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만 향한 것으로 말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신앙 행태는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의 다른 것은 십자가를 가리는 것으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의 주술과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양보도 타협도 있을 수 없는 믿음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은 신 21:22-23절의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율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죽을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나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을 죄를 범하여 나무에 달린 자를 아래에서 바라보고 있다 해도나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아서 나무에 달리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임을 보게 하는 것이지 말씀을 실천하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자가 되게 하겠다는 뜻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취지에 대해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간과할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 기독교처럼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된 갈라디아 교회처럼 말씀을 실천하여 자기 의를 이루고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열심과 실천으로 나타나는 선함과 의롭게 여겨지는 모습들을 믿음의 증거, 열매로 여기게 되면서 결국 죄로 인한 저주는 나의 일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않는 다른 사람의 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시는 방법은 많습니다. 돌에 맞아 피 흘려 죽는 것도 있고 칼에 의해 죽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꼭 십자가여야 하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으시는 것은 용서의 효력이 없기 때문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신 21장과 연결된 13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신명기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해 죽을 죄를 범한 자들이고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입니다.

 

 

27:46절을 보면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버림받으신 현장입니다. 이것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와야 할 저주와 버림받음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간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인간 됨을 보게 되면 말씀을 지키고 실천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는 신자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실상은 십자가로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나무에 달린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이고 버림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하고 잘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품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꿈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이라면 지금의 교회가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들은 모두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하고, 신자답게 살고 의를 이루라는 말에 오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죽을 죄를 범하고 죽임을 당해 나무에 달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말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됨을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

 

 

그런데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십자가 신앙에서 용납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생활이 십자가 신앙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에서 자신을 죄를 범해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로 보는 것인데 그러한 신앙에서지키자는 말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자신을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죄로 인해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해야 할 저주받은 자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이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거짓된 믿음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기에말씀을 실천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앙생활에 힘쓰면서 자기의 부족을 채우고 잘못된 것을 고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는 것으로 용도는 끝났고 이제는 우리가 잘하는 것이 남은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를 가리고 십자가의 원수 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말도 구원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게 되면 바울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에 구원을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되었다는 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의 값인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러한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충족시키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속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속량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아 자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이루신 자유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행함에 눈을 돌린다면 예수님이 피로써 이루신 속량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셨는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의 행위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아닌 육체의 영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11,12절의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에서는 율법의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에서 율법의 행위가 나온다면 그 행위로 의롭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는 현대 교회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14절을 보면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방인과는 절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안에서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미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은 효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예수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모든 조건과 행함을 초월하여 예수께 속한 자라는 것 하나가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게 합니다. 여기에 율법을 행하는 행위는 어떤 효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고 이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행위로 인한 염려와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행위의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 구원에 멀어지는 예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행위에 매이고 행위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멀어진 것으로 간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은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선한 일을 묻습니다. 그리고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말씀에 모든 것을 지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며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고 예수님은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답하십니다(19 16-26).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제자들이 알게 된 것은 아무도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교회를 찾는 모든 사람은 구원될 수 없는 인간 됨에 눈을 떠야 합니다.‘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절망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게 하는 것이 진리의 성경입니다.

 

 

우리는 나무에 달린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어둠이라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어둠에서 율법을 행하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과 저주가 전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둠이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속량하심으로 빛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빛에 속했다고 해서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둠은 빛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빛이 빛으로 사는 것은 빛으로 드러난 어둠이라는 자기 실상에서 빛으로 오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빛으로 행하는 선한 행실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라는 저주를 지금의 나의 실상으로 보지 않으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복이 된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저주를 받아들이면 모든 공로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께 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고 주님의 행하심을 자랑하고 높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저주의 존재로 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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