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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12-16

갈 4:12-16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121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설교>

여러분이 자신을 성도로 여기신다면 가장 먼저 성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기 인식이 있는지부터 생각하셔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기의 행실과 성품으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거룩한 분에게 소속되어 모든 악함이 가려지고 거룩하다고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거룩에 의해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이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성도로 택한 자에게만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야 할 자기 이해와 인식은 죽음에 속한 인간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세상을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인 십자가를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성도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자기 노력과 능력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능력이 되어 자신을 살리고 살게 하는 것만 참된 현실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과연 이러한 이해와 인식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은혜라는 영역 안에 두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으로 새롭게 창조하시고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활동 무대는 오로지 은혜로 국한되어야 합니다. 만약 은혜라는 영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면서 자기를 위한 자기 믿음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믿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모든 것은 성경에서 벗어난 허구가 될 것이고, 그 증거는 은혜만을 증거 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믿음에 연연하면서 늘 좋은 믿음이라는 것에 미련을 둡니다. 믿음을 자신의 힘으로 확고하게 세워야 하는 자기 영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좋은 믿음으로 구축된 자기 영역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보상처럼 생각합니다. 믿음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믿음은 자기 실력의 결과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믿는 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전도, 선교, 구제, 봉사의 부분도 우리의 믿음과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의 믿음과 열심과 실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영역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취지를 알지 못한 인간의 잘못된 해석일 뿐입니다.

 

 

율법에 담긴 참된 취지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믿음으로 이루는 자기 영역이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알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오직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영역을 증거 하는 복음에 속해있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행함과 믿음으로 구분되어 서로 충돌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행함을 자기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교만이믿음이냐 행함이냐라는 헛된 충돌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충돌로 함께 예수를 믿고 복음을 기뻐한다는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이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울의 말을 통해서 바울과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참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된 말은 진리를 뜻합니다. 즉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교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자기 영역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처음부터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교회의 관계는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3,14)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바울이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도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열심을 내었던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당연히 환영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육체의 약함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으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갈라디아 교회는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서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너무 사람을 신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바울을 예수와 같이 영접할 정도로 좋아하고 공경했다 하더라도 자기 눈을 빼 줄 정도라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설령 교회가 바울을 그처럼 대접하고 높인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라면 오히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높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전의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내가 전한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 전하는 나에 대해서도 천사처럼 예수처럼 영접하고 높이더니 지금은 왜 원수처럼 대하느냐라며 인간적인 섭섭함을 보이는 것에 아니라 복음을 향한 생각이 달라진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고 공경했다면 그것은 바울이라는 인간을 좋아한 것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뻐하고 좋아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곧 생명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복음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있게 된다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눈이라도 빼 줄 수 있는 심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 때문에 바울이 고후 12장에서 육체의 가시로 표현한 것이 눈병을 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가 자기에게서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주께 간구할 정도였다면 그만큼 고통이 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바울을 보면서 복음을 위해 할 수만 있으면 내 눈이라도 빼 주고 싶다는 심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바울과 교회의 관계였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변하지 않는 한 바울을 향한 교회의 마음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원수가 되었느냐라고 말할 정도로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우리는 이제 복음보다 율법이 더 좋다라며 복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이고 복음을 믿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복음에 관한 생각입니다. 바울에게 들었던 복음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 기독교인이 전한 율법이 포함된 복음이 자신들에게 만족이 되는 복음으로 다가오면서 바울의 복음은 귀에 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왜 복음인가를 아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는 복음을 복음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을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로 말하는데 이것이 무시되고 대신 인간의 열심을 요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자기를 위하여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비록 타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산다 해도 따지고 보면 의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봉사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를 행하는 사람 앞에 서면 우리는 그에 비해 의를 행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교회가 서로를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모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발생하는 것은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고 저울질하면서 나타나는 대립일뿐입니다. 자기의 믿음과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만 있을 것이고 결국 종교적인 자기도취와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전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담긴 위험성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복음을 믿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만 참된 복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복음을 믿는 교회로 함께 한다면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충돌은 수시로 나타납니다. 이상한 것은 서로가 복음을 들고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네가 알고 있는 복음은 잘못되었고 내가 말하는 복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똑같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데 복음에 대한 생각과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감정 충돌이 되어 다툼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툼과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알고 싶고 복음으로 참된 믿음의 길을 가기를 원하는 선한 생각으로 함께한다 해도 의견이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충돌로 이어지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의 충돌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울의 복음과 충돌하는 갈라디아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잘잘못을 판결할 바울과 같은 권위의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할 것이고 결국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맞는 말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문제에서 초점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질인 저주와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복음을 찾아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무능한 자로 복음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해의 다름으로 인한 충돌이 있다 해도 결국 은혜 안에서는 하나 됨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 9:27절을 보면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말을 합니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이 뜻밖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마치 구원에 확신이 없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버림당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확실한 구원을 확실하게 하려고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는 열심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은 율법을 행하는 것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뿐입니다.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울이 복음을 믿고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것이 바울의 실력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복음에 참여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믿고 전파하게 되었을 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다스림이 아니면 자신을 언제든 복음에 대해 등을 돌릴 자라는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쳐 은혜에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다르지 않은 것은 몸은 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위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몸으로 율법을 행하고 그것이 의가 되어 구원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의 몸을 치며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영적 싸움이며, 이러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이 곧 구원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역에는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성취하거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심으로 베풀어지는 혜택으로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지 의롭게 되었으니 그 의를 말씀을 행하는 것으로 증거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행함이나 열심 등의 모든 것은 무너지고 부인되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복음을 믿었다고 자부한다 해도 복음으로부터 버림받을 뿐입니다.

 

 

12절을 보면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유대 기독교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방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그러한 비방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비방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위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방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복음에 머물러 있는 것을 사도의 본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자의 본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에 참여된 것이 신자이기에 복음에 머물러 있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내가 비방 받지 않고 인정을 받으며 칭찬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머물러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 때문에 비방 받는다고 해도 복음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해롭게 하는 것은 오히려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 타협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다는 비방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에 참여된 신자는 복음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인 십자가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우리의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함을 기쁨과 감사로 마음에 품고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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