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7 17:05

(29강) 해산하는 수고

조회 수 82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성경본문 갈 4:17-20

갈 4:17-20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172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설교>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성도에 대한 모든 것은 성경을 통해서만 배우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어떻게 발생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성도를 택하여 부르시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 목적 또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이해조차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인간으로서 믿음의 도리를 다하고 힘쓰는 것이 성도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었으니 예전의 행실을 버리고 좀 더 나은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성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두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종교인이지 거룩한 성도는 아닙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서 성도답게 되겠다는 것이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율법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을 실행하여 의롭게 되겠다는 것이 욕망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욕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거룩한 성도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내 속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며 확인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이 선으로 규정한 윤리적인 모습과 선하다고 생각하는 성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선한 믿음의 행실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킨 성인의 수준으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로 자처하는 종교인의 욕망으로 예수님이 여전히 핍박을 받으시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1:26-28절을 보면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의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하고 의로운 분으로 말하면서 사람이 선하고 의롭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인간에게 가치를 두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고 땅을 다스릴 권한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저주받은 존재이며 티끌인 인생일 뿐입니다. 티끌인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보십시오. 욕망에 다스려지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에 매몰되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는 우리가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죄의 권세에 붙들려 다스림 받는 현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리스도의 형상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면 그리스도의 형상도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다스림을 받는 신자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계에 대한 것이지 사람이 자기 믿음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바람직한 믿음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면서 믿음으로 살게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가 할 일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께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를 교회 생활과 윤리를 기준으로 하여 멋대로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에게 만족이 되는 믿음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다스림 받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왜곡되어 있고, 사람들의 열심도 왜곡된 것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간시킨다는 것은 바울의 복음을 버리고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의 열심입니다. 자기 말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자기 뜻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뜻에 의한 열심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열심을 내게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열심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속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선하고 의롭게 여겼던 행위들조차 죄로 드러나기에 저주와 심판이 차고 넘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아들 되게 하신 이유를 저주와 심판으로 가득한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신자에게 믿음은 자신을 높이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것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여자가 해산할 때 고통을 겪는 것처럼 바울이 믿음의 사람을 낳기 위해 고통을 겪는 수고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내용도 아닙니다. 해산하는 수고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임을 생각하면 바울의 해산하는 수고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드러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3:16절을 보면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벌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고통을 주신 것이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피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임신하는 고통은 단지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부모에게는 자식이 고통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부모의 욕망을 채워주는 만족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때 고통이 되는 그 모든 것이 죄로 인한 저주 아래 있는 흔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딤전 2:13-15절에 보면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해산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된다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인데 해산하는 것이 어떻게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하는 것이 될까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기존의 자기 세계는 사라지게 됩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살던 세계가 아니라 자식을 위한 세계로 바뀝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고 자기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라는 존재가 삶의 이유가 되고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뱃속에 잉태된 씨로 인해서 전혀 다른 세계가 주어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주의 존재인 우리의 구원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전혀 새로운 씨가 잉태되고 그로 인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수고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므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자녀 됨을 위해 수고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잉태되어 새 생명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 되었으니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나타내는 도구여야 한다는 점에서 자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으로 여겼던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언성을 높이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수고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께 다스려지는 새로운 피조물로 나타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다스림 받는 사도에게서 나타나는 열심입니다.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을 받았지만 참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신자의 길입니다. 저주에 속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와 다 이루심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원수처럼 대접받아야 하는 것이 신자가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기를 위한 세계는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께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기쁨과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는 이루어야 하는데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와 자기 책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장담할 수 없는 모호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믿음에 대해 부족하다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피가 능력이 되는 용서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의롭게 되는 것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증거되고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죄에 매여서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아야 하느냐고 반박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여 신자 됨을 나타내는 것이 곧 신자의 사명이라는 것이 선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이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힘으로 믿음을 주도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열매를 맺겠다는 것이고 결국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게 되면서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원수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쉬지 않고 행하는 유혹입니다. 인간의 의로움으로 십자가를 훼방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십자가의 은혜의 향기가 어떤 자리에서 발산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죄로 드러나 죽음의 존재임을 실감하는 자리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행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믿음 좋음과 의로움에 관심을 두는 율법의 자리일까요? 신자의 역할이 행함으로 은혜의 향기를 발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기에 자연히 은혜가 발산되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자로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를 위한 믿음도 인생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수고는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이 해산되는 것으로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도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뜻에 붙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는 남은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1862
공지 고린도전서 강해 이동 신윤식 2019.09.14 12593
공지 동영상 파일에 대하여 신윤식 2011.03.03 7381
공지 이전 홈페이지 주일오전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39232
170 대상 11:4-9 (35강) 다윗 성 신윤식 2023.02.05 472
169 대상 11:1-3 (34강) 다윗의 언약 신윤식 2023.01.29 479
168 대상 10:1-6 (33강) 사울의 죽음 신윤식 2023.01.22 461
167 대상 9:23-27 (32강) 문지기의 책임 신윤식 2023.01.15 544
166 대상 9:17-22 (31강) 회막 문지기 신윤식 2023.01.08 450
165 대상 9:10-13 (30강) 힘 있는 제사장 신윤식 2023.01.01 566
164 대상 9:3-5 (29강) 예루살렘에 신윤식 2022.12.25 506
163 대상 9:1-2 (28강) 바벨론으로 신윤식 2022.12.18 512
162 대상 8:6-13 (27강) 에훗의 아들 신윤식 2022.12.11 439
161 대상 8:1-5 (26강) 베냐민이 낳은 자 신윤식 2022.12.04 883
160 대상 7:13 (25강) 빌하의 손자 신윤식 2022.11.27 496
159 대상 7:1-5 (24강) 지파와 지파 신윤식 2022.11.20 476
158 대상 6:54-60 (23강) 레위 자손의 거주지 신윤식 2022.11.13 475
157 대상 6:49-53 (22강) 아론의 자손 신윤식 2022.11.06 481
156 대상 6:47-48 (21강) 레위 사람들 신윤식 2022.10.30 502
155 대상 6:31-38 (20강) 찬송하는 직분 신윤식 2022.10.23 549
154 대상 6:16-19 (19강) 언약궤를 위하여 신윤식 2022.10.16 511
153 대상 6:10-15 (18강) 제사장 족보 신윤식 2022.10.09 517
152 대상 4:24-31 (17강) 거주지 신윤식 2022.10.02 592
151 대상 4:21-23 (16강) 왕의 일 신윤식 2022.09.25 52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