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1 18:15

(31강) 두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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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22-26

갈 4:22-26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2226.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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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설교>

신앙생활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감사하는가?’라는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바른 생활의 인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주가 행하신 모든 일을 감사하는 자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교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신앙을 바른 생활로 해석하게 되면 교회는 당연히 바르게 사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강조하면서 바른 삶으로 인정되는 조건과 기준을 제시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조건과 기준에 맞춰 자신의 믿음 수준을 저울질할 것이고 만약 부족하다면 자기를 반성하면서 더 나아지기 위해 힘쓰는 것을 신앙생활로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목적을 모두 무시하고 자기의 옳은 바를 따라가는 인간의 오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수긍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이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참으로 하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너무 가볍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과 의도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과 의도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이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바른 생활을 가르치고 요구한다면 성경은 우리를 바른 생활로 이끄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도무지 바른 생활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한 것이나,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후손을 잇는 내용만으로도 바른 생활과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취지에 맞게 해석을 억지로 하기에 육신적인 방탕한 생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궁색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과 이삭을 낳은 사라 이야기를 합니다. 여종인 하갈에게서 난 아들을 육체를 따라 났다 하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여자가 두 언약을 비유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바른 생활, 바른 행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은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를 참된 신앙생활로 이끌기 위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하는가를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가 언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단순히죄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런 것이면 사실 구약의 이야기는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갈과 사라가 낳은 두 아들 이야기 없이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야기는 얼마든지 믿는다고 말하고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낳은 것은 거의 21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저주가 되는 조건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해서 이미 확정되어 나타났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전의 시대에는 구원과 저주의 조건이 모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확정된 것이 명확하게 증거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두 아들의 이야기로 하나님이 확정해 놓으신 구원과 저주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저주에 대한 것입니다. 구원은 저주에서 구출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저주가 되고 저주 아래 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죄가 언급되지 않고 죄를 모르고서는 예수님의 용서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고도 용서는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용서받음을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의 능력을 알게 하고 용서로 인한 참된 감사로 이끌기 위해 죄와 저주의 이야기를 성경 전체에 펼쳐놓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펼쳐있기에 우리는 도무지 죄와 저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성경 구절도 죄와 저주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마치 나와는 관계없는 내용으로 치부하면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용서, 구원, 천국에 대한 것을 교회를 다니는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오류 속에 있는 현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22-24절을 보면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됩니다. 그런데 왜 두 언약일까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언약은 하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만 초점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 언약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음에 초점을 두지 않고 나를 구원하는 언약에 초점을 둔다면 언약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와 함께 두 언약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구원 방식을 통하여 십자가로 이루어진 용서의 능력과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 언약의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저주는 언약에 의해 나누어집니다.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이 저주인지가 언약을 통해 이미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두 언약의 등장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구원과 함께 저주도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두 언약 앞에서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구원과 저주의 기준을 멋대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 여자의 이야기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갈이 사라의 여종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사라를 자유 있는 여자로 지칭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인에게 매인 여종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또한 바울은 아브라함의 한 아들을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하고, 또 한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5,26절을 보면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둘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하나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 즉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하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로 우리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두 여자를 비유로 하여 두 언약을 통해 행함은 육신에 의한 땅에 속한 것이지만, 믿음은 육신에 의하지 않은 위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 여자, 즉 두 어머니가 낳은 두 아들을 함께 말합니다.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하갈이라는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육체를 따라 난 땅에 속한 종의 자식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래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종의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언약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홀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내용이지만 문제는 구원을 받은 자로 성경을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 , 심판의 이야기를 불편해합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옳다면 바울은 여종 하갈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두 여자를 비유로 두 언약을 말하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 된 것을 말하고 구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함께 말하는 이유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언약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따라 난 종의 이야기를 하면서저들은 종된 자 그대로인데 너는 위에 속한 자유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 속한 자가 된 내막을 통해서 용서와 긍휼과 사랑하심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서 죄와 저주받음의 이야기는 결코 삭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 있는 여자로 비유되는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약속하셨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 약속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약속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위해 동원한 방법이 하갈입니다. 하갈을 통해서는 아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브라함을 하갈과 동침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식으로 말하면 믿음에 행함을 더한 것입니다. 믿음을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서는 믿는 자의 행함이 필요하다는 발상입니다. 그리고 행함은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것을 내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은 하나님의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행함을 만들어내는 우리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기에 바른 행함, 바른 생활을 믿음과 결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자고 우리 어머니라면 신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행함이 아닌 십자가에만 모든 가치를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되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으며 모든 가치를 십자가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신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면 이런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신자로서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을 자기 힘으로 나타내보고자 하는 육체의 생각일 뿐입니다.

 

 

두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인생길을 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에 개입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죄에 대해서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절제하거나 극복할 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이기 때문에 두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히 여기심이 나를 살게 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23:1-6절의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찬송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감히 받고 누릴 수 없는 하늘의 혜택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여자는 종과 자유자로 구분됩니다. 종이 낳은 자식은 종이고 자유자가 낳은 자식은 자유자입니다. 행함의 여부에 따라 종과 자유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 사항입니다. 그런데 자유자인 어머니는 이 세상이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하늘의 방식으로 태어난 자가 있는데 그들이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태어난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행함이라는 세상의 방식으로 십자가를 증거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은 우리의 행함으로 증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나를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하는가를 열심히 증거하면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에 의한 구원은 반드시 우리의 저주받음을 고발하며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 행함에 의미 두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자기 것에 집착하고 매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에 나를 따름으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되는 즐거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지향하는 종의 세계에 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이루시는 영의 세계를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인간을 종과 자유자로 구분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모두가 종의 자식으로 나지만 십자가로 인해서 자유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 말할 때는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말하는 인간 됨과 세상의 기준으로 말하는 인간 됨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신자는 육체를 따라 난 종의 신분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었고 주로 인해 하늘에 속한 자유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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