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7 16:57

(75강) 사도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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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19-21

고후 12:19-21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192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20.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설교>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에게 행복을 주는 날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 중심의 나를 위한 현실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습성은 신앙 문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교회는 이래야 하고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위주의 거짓 현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교회는 이래야 하는데 왜 저럴까?’‘믿음은 이래야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라는 고민과 염려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자기 위주의 생각일 뿐입니다. 자신이 상상하고 만들어 낸 거짓 교회, 거짓 신앙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집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일이 무척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회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자기 생각에 꿰맞추는 식으로 보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 위주의 가짜 교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우리 위주의 생각으로 보게 되면 바울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모습과 문제들로 인해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바울로 인식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 때문도 아니고 교회 때문도 아니라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할 복음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20,21)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에 가기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서 그들을 만났을 때 서로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과연 본문에서 네 번이나 반복하여 말하는 바울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일까요?

 

 

내용만 보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을 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악한 행함을 회개하지 않은 것 때문에 바울이 슬퍼하게 될까 두렵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좋지 않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을까 하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파당과 분쟁이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기대했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런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을 바울이 두려워하고 염려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바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파당과 분쟁이 사라진 교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해야 바울의 두려움에 타당성이 있습니다. 교회에 파당과 분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능력이 훼손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이기고 극복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모습을 갖추는 교회 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능력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죄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에 대해 말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교회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나, 21절에서 하나님이 바울 자신을 교회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자신이 낮아지는 것 또한 관심 두지 않은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써 사람들의 기대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음을 잘 알았던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가장한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자들이 원하지 않는 사도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인간을 신뢰한다기보다는 바울이 자신이 아닌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 오직 복음만을 증거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바울은 19절에서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말을 자기를 변명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이나는 옳고 너희는 그르다는 싸움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에 뜻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변명이나 자기 증명의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변명의 말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고상한 말로 자신을 세우고자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심판받을 저주의 존재라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는하나님 앞에를 아예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울의 말을 자기변명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 대해 비난으로 반응할 뿐이지 바울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11장에서 자신이 고난을 겪은 이야기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을 치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이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으면서도 육체에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주시고 그것을 떠나가게 하기 위해 세 번 간구했지만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시면서 평생 가시로 인해 고생하게 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시고 신자로 부르신 자들을 세워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대해 자신을 하나의 답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를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게 하여 영광 받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 자신을 보고 깨닫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바울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모두 다 잘못된 것이고 낮아지고 가난한 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이 존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가 할 일이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보기를 원한 것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울에게서 자신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사도다움을 보고 싶어 합니다. 거짓 사도들이 자신을 가장했던 그리스도 사도의 모습, 사탄의 일꾼들이 가장하는 의의 일꾼의 모습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사도로 인정할만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사도로 보일 것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기대하고 원하는 사도가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여전히 자신들이 원하는 사도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교회는 반드시 인간에게 주목하고 인간을 앞세움으로써 십자가의 피의 공로와 은혜를 멸시하고 훼손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되면 누구든 자신을 정당한 자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것들은 자신을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 앞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보이고자 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죄의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울의 두려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볼품없고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고린도에 가게 하셨을 때,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있다면 바울을 무시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바라보며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가운데 있다면 바울에 대한 시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었을 때 드러날 하나님 앞에 있지 않은 현실을 염려하고 두려워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가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고 결국 십자가의 의로움의 거룩함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십자가의 은혜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세워졌습니다. 피의 능력은 자신의 어떤 의로움으로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만 예수의 피가 용서의 능력이 되어 구원받게 됨을 믿는 것으로 자랑 됩니다. 이것이 예수의 피를 믿는 교회라면 사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세운 기준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두려움은 교회가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인정받을만한 바른 행실을 갖추지 못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무시되고 멸시받는 문제로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나는 이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라는 것도 자신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내 것으로 고집하며 자기를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고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로 자리하는 것이 내 몸을 주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에게 기대하고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사도를 세워 일하시는 방식에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자신의 능력과 재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매이고 붙들린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도를 통해 자신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모른 것입니다.

 

 

벧전 2: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 것으로 주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원하거나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는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잘남을 위해 일하시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교회가 서로의 잘남을 두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교회로 세우신 뜻에 대해 외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말이 자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으로 세워져 가는 교회 됨을 위해 말한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너희로 인해서 아름다운 덕이 선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는 우리를 주도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은혜가 힘으로 작용하는 신자에게는 분명 다른 점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시고 어떻게 희생하셨는지를 알게 되고, 그 사랑과 희생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잘남을 세울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아픔과 사랑에 참여하게 하여 아름다운 덕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위상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주일에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신자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우리의 몸을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담을 그릇으로 삼아 사용하신다는 것이 신자의 위상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것으로 자신의 잘남을 나타내고자 하는 자신에 대해 두려움과 염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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