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1 18:35

(80강) 교회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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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3:11-13

고후 13:11-13http://onlycross.net/videos/co2/co2-13111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설교>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세상의 현실에서 경험하고 실감할 수 있다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기에 성경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기계적인 생각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필요한 말씀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을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고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과 현실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성경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을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마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바울의 마지막 인사로 생각합니다. 편지를 끝내면서 형식상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는 말로 여기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를 보면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은 살전 5:26, 고전 16:20, 16:16절에서 언급되고,‘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도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딤전 6:21, 딤후 4:22, 3:15, 1:25절에서 언급됩니다. 이처럼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에 자주 사용한 말이라는 것 때문에 인사말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편지를 쓸 때 마지막을 상대방의 평안을 비는 말로 마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받았다 해도 본문은 다른 뜻은 없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무리 인사 정도로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현실의 문제와 상관없이 단순히 평안을 비는 인사말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분파와 은사 문제로 인한 다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교인들의 관계도 좋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바울은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단지 좋은 말로 인사말을 하면서 편지를 끝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의 관계가 좋은 교회라면 바울의 말처럼 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모든 인간은 타인이 아닌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타인의 피해와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성향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어떤 일에서도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을 누리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이 현실에서 경험하고 실감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그저 듣기 좋은 말로 편지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살펴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바울이 교회를 향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개선하여 고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교회에는 분쟁이 있으면 안 된다. 분쟁을 멈추고 예수님의 용서를 본받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식의 충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교회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상을 향해서 예수 믿는 자다운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도 교회답다는 인정을 받고 칭송을 듣게 되는 것을 참된 교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세상에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러한 교회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으로 증거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증거될까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책임지고 간섭하시면서 이끌어 가고 계시는 현실이 교회의 참된 현실로 증거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며 기대하는 교회관에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관이 바울의 교회관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은 바울의 교회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교회는 인간의 양심이나 윤리 도덕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의 착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을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분쟁과 다툼 등등이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개의 기독교인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관입니다. 교회의 문제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줍니다. 저주 아래 있는 죽음의 존재인 나를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담고 함께 하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는 사람의 양심이나 착함과는 무관합니다. 또한 행실이 착하지 않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행실의 착함에 믿음의 의미를 두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가 증거되는 일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고전 1:2-3절을 보면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말씀드리면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바울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칭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관으로는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없이 착함과 서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따뜻함으로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를 우리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부르셨고 예수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를 덮으신 피의 은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없는 착한 사람을 따로 불러서 교회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교회 됨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합니다. 본문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행함이나 착함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뻐하라는 것이나 위로를 받고 마음을 같이 하고 평안 하라는 말이 고린도 교회가 믿음을 회복하여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은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며 우리가 채우고 이룰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세계입니다. 이러한 예수 안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온전함과 위로와 마음을 같이 하는 평안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개입하여 이루어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서 벗어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현실은 성령이 개입하여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행함을 근거로 해서 인간이 자기의 행함을 근거로 세우고자 하는 교회를 예수 밖에 있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령의 개입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 증거는 날마다 반복되는 인간의 실패를 인식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것으로는 예수의 피와 연결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 성령이 다스리는 현실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관이 무너지고 바울의 교회관에 함께 하게 되는 것으로 본문의 내용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실패는 우리를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실패를 거울삼아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교회를 그럴듯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고 헛된 탐욕임을 알게 하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교회라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성공으로 포장하는 거짓된 것임을 고린도 교회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문안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문안은 대상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친한 사람, 또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 문안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성도가 문안한다고 합니다.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예수 안에서의 문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과연 모든 성도의 문안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의 교회관으로 생각한다면 고린도 교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문안이 아니라 비난과 책망이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사도로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만으로도 문안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문안을 하고 문안받는 관계로 묶어 놓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안에서는 누구도 문안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근거로 한다면 모두가 거룩한 성도로 문안을 하고 문안을 받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문안은 단지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서로를 영접해야 하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지금의 교회가 예배를 드리면서 옆 사람을 향해사랑합니다’‘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라는 말로 인사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13절의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도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 하는 목사의 축도를 생각하게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축복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로 인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로 증거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우리에게 함께 한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바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구원과 신앙을 위해 필요한 곳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존재하게 된 신비의 세계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실패자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발전시켜야 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심을 만족시켜주는 놀이터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를 놀이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것보다 사람이 즐기고 만족하게 하여 교회를 찾고자 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교회 됨을 저주하기에 십자가 앞에서 저주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6:10-11절에 보면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운명은 예수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신자 또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습니다. 이러한 신자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현실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이나 세상에 이름을 높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은혜가 담긴 복음을 증거 하는 것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교회 됨에 뜻을 둔다면 주께서 피로 이루신 완성의 세계에서 바울이 말하는 기쁨과 온전함과 위로와 평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 섰을 때 주께서 이루신 은혜가 선명히 보이게 됩니다. 그 은혜만을 앞세우고 은혜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로 함께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 주은 2021.05.04 13:56
    끝없이 나오는 죄의 모습들에 절망치 않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기 때문이지요
    죄의 모습들을 보게하심으로 십자가의 은혜안에 있음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체험케하시니
    그 은혜로 거저삽니다.
    거저살게됨을 깨닫게 하는 복된소식을 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보면서 목사님 잘지내시는듯 해서 감사하네요ㅎㅎ
    멀리서 늘 뵙고 있는 것도 거저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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