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3 15:50

(9강) 사도와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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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2:6-10

갈 2:6-10http://onlycross.net/videos/gal/gal-02061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설교>

우리는 일반적으로 좋은 인품을 가진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특히 목사처럼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인보다 더 수준 있는 인품을 요구합니다. 목사가 일반 교인보다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믿음의 정도는 인품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좋은 인품을 성령이 충만하고 거듭난 모습으로 평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거듭난 증거가 인품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품은 그 사람의 언행에 의해 평가됩니다. 그래서 말이 거칠고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인품이 좋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믿음까지 의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대하고 판단하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시각에 의해서 바울도 사도의 자격과 자질의 문제에 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과거 행적이 바울을 바울로 알아보지 못하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회의 시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어갑니다.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8)라는 말이 그러합니다.

 

 

바울은 사도를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인 이방인의 사도로 나누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할례자이든 이방인이든 복음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교회를 핍박한 자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할례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사도로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할례자들, 예루살렘 교회 또한 자신들의 과거 행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다면 할례자인 그들은 예수를 죽인 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던 일을 무마하거나 가볍게 하려고 할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를 핍박한 바울에 비해 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생각이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인간이 어떤 인품을 가졌는지는 고려할 사항이 전혀 아닙니다. 인품이 구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제약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할례자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때문에 구원의 내막과 본질을 알게 된 신자라면 인품이나 행실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자체가 할례자와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 그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할례자든 이방인이든 저주받은 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에서 건짐 받고 저주에서 해방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할례자와 이방인의 구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이가 바울도 사도로 삼았다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할례자와 이방인의 사도로 구별하여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할례자와 이방인이 저주의 사람이라는 것에 차별이 없다면 이들의 사도 역시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력한 자로 이름 있는 사도라 해도 바울의 사도 됨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도의 관계를 9절에서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기둥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들을 믿을만한 사도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도 주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았기에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라 해도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도직을 자기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그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사도로서의 가치나 지위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할례자의 사도인 베드로에 비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이 더 열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든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바울이든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시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해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에게로 돌아갈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름이 있고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사도들을 언급하여 자신의 사도 됨을 말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여 바라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고 복음의 시각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고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자신을 믿는 자로만 간주하기에 사람을 차별하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영광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로 믿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대부분은 영광의 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영광의 주가 되신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광의 주라는 것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만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영광을 받을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와 차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하고 사도와 사도를 차별하는 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은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과 십자가에 못 박힌 한편 강도를 같은 시각과 비중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행한 일과 업적, 인품, 그리고 개인적 관계의 여러 조건이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의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행실이 선하든 악하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로 그 존재에 차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유력하다는 것, 기둥 같다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말하는 교회에 유력한 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있고 기둥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십자가 앞에 나오는 모습은 아닌 것이 됩니다. 교회가 십자가가 아닌 사람을 바라보고 신뢰한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 신자의 말에 이끌려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것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시각에서 떠난 것이기에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전 2:11-12절에서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행함은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어떤 행실이나 업적도 하나님의 의의 행위 앞에서는 무가치함을 알고 하나님의 행하심만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에만 모든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에 따로 유력한 자, 기둥 같은 신자로 여김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에게 초점을 두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이 되거나 많은 일을 한 사람을 차별의 시각으로 대하면서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둥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부탁한 것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무슨 의미로 그러한 부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그들을 돕는 구제에 힘써달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이든 바울은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온 일이라고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신뢰하는 그들과 같은 생각, 같은 일에 힘써왔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부르신 사도라는 자리에서 다른 점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바울은 살아온 삶과 행적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주께서 사도로 부르신 일에 그것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사도와 사도를 구별하여 차이를 두고 누군가를 더 우월한 사도로 인정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의 사태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 없는 모습이 쉬지 않고 분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서신을 보면서 반드시 생각하고 알아야 할 우리의 실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와 다릅니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게 되고 유대인들에게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악수의 진정한 의미는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관계에서 친교의 악수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겨지는 사도들이 자신에게 친교의 악수를 한 것을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34-35절을 보면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환상 중에 하늘에서 부정한 것이 담긴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으라는 음성을 듣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을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하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위치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삶이 복음에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1절부터 말하는 안디옥에서의 일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일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게 되지만 그 또한 사도의 우열을 나누는 기준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복음을 말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성숙 되고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생활과 자기 변화에서 찾습니다. 저는 신앙의 성숙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는 않지만 성숙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저주받은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만 참된 생명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5:18-19절에서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인품이나 행실에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차이가 있다 해도 우리는 아담의 범죄 안에서 정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으로 함께 합니다. 그래서 사도와 사도의 관계에 우열이 있을 수 없고 신자 또한 같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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