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3 17:23

(69강) 육체에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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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7-10

고후 12:7-10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071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설교>

신자에게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영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값없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말합니다. 은혜의 복음이 우리를 살리고 영생을 주고 죄인을 거룩한 신분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증거 합니다. 복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소위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교회라면 말씀드린 내용에 동의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중심 교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과 교회로서 나아가는 방향과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은혜가 우리를 끌어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한 예로 은혜를 받은 신자의 책임과 의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실천하고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기 집착이 도덕적인 의를 추구하게 하고, 그 의로 믿음과 은혜의 여부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러한 자를 신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의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그것은 복음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은혜가 우리에게서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그 증거는 우리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이 오신 이유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도덕적인 의로 믿음을 보여주고자 한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고, 어떤 체험을 했다 해도 그것으로 인간의 가치가 높여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어 놓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이며 은혜에 붙들려 사는 것이 은혜가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손길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가 그토록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은혜의 한 조각도 우리 안에 남겨 놓을 수 없는 무능한 자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무능한 자로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을 능력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의 믿음은 왜곡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일하고 힘을 씁니다. 결국 은혜를 말하면서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은혜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다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원으로 이끌려 간 바울의 체험에 마음을 둔다면 그 또한 신비한 체험이 있으면 자신의 가치가 높여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 됨에 대해 자신을 예외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놀라운 계시로 인해서 자만해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만해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높인다는 뜻입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듣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면 그것을 도구 삼아 얼마든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시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를 받은 나에게 마음을 두는 그것이 자만이기에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에 가시를 사탄의 사자로 언급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육체에 가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하면 하나님이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재앙은 분명 사탄이 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 또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에 사탄의 뜻대로 활동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11,12)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욥의 소유물을 치면 주를 향하여 욕한다는 것이 사탄의 의견이었고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사탄의 손에 맡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유물과 자식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통해서 욥의 신앙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사탄을 활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활용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욥 개인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소유물을 치면 주를 욕하게 된다는 사탄의 속성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 됨을 드러내시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음을 증거 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탄이 욥의 소유물을 치고 싶었던 것은 욥으로 하여금 주를 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로 칭송받는 욥이 주를 욕하는 것이 사탄에게는 하나님을 이기는 승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가장 큰 약점이 소유물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탄의 튼 착각이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알고 하나님의 위대하심만 신뢰하게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은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1-3)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육체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임을 사탄을 도구 삼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욥이라는 한 개인을 주를 욕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될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은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잊지 않아야 할 영적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로 하락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욥의 소유물을 치고자 했던 사탄의 정신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육체에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한 것은 육체에 고통이 있게 하면 셋째 하늘을 경험한 바울조차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탄의 계책으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사탄의 계책도 허용하심으로써 오히려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경험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신비한 경험이 육체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평안을 누리며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신비한 경험이 신자에게 능력이 된다면 바울이 가시를 떠나가게 하기 위해 세 번 주께 간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 번 간구했다는 것은 가시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육체에 가시, 다시 말해서 바울을 고통스럽게 한 육체의 질병이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육체의 질병이 인간을 자만하지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면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자만하지 않기 위해 바울처럼 육체에 질병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경험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자만은 경험이 있는 자신을 경험이 없는 자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경험을 자기 자랑으로 삼는 것이 자만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을 경험한 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도에 비해 특별하다는 증거도 아니라면 하물며 육체의 무엇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믿음의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거짓 사도들이 자랑했던 어떤 육체의 조건도 누가 참된 사도인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축된 믿음과 은혜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자기 이야기는 우리의 사고로는 도무지 짐작도 하지 못할 믿음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착각으로부터 해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신다는 것까지 바울의 이야기와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을 약하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시고 세 번의 간구에도 가시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면 내가 강한 신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강한 신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생각이 흔들리고 균열이 생기고 부서지고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바울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데서 오히려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이 자만하지 않게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가시가 은혜라는 것이 아니라 가시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바울이 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육체에 가시가 있다 해도 기도하지 말고 지금의 은혜가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라는 뜻일까요?

 

 

바울에게 여전히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을 사탄의 사자가 가시로 박혀 있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고 우리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자만하지 않도록 치시며 약한 자의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도 은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주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을 위해 은혜를 구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몸을 위해 은혜를 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주도해가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딪히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사탄의 사자가 없다면 이러한 부딪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에 가시, 사탄의 사자를 남겨 두시고 같이 인생길을 가게 하시는 것은, 인간이 왜 무능하고 무가치한지를 알게 하시는 자리에서 주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만 모든 가치를 두고 주를 바라보는 자로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그런 용도로 부르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에 내가 잘돼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사탄의 정신을 따라 자기 몸에 가치를 두는 다른 복음이라는 사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2:4-6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서 존귀하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존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일까요? 우리는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에게너는 처음부터 가치가 없고 가치 있는 자로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가치만 높여지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도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만 자랑하고 높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우리를 쳐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가치 있는 자로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일의 도구로 사탄의 사자로 불리는 육체의 가시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에 가시로 인간 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가시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질병일 수도 있고 육신을 힘들게 하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가시라 해도 내 몸에 집착하게 하는 사탄의 사자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약함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가시를 두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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