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0 19:04

(70강) 약함과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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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9-10

고후 12:9-10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091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설교>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후에도 이러한 인간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해도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인간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삽시다라는 말은 성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자들이 자기를 위해 성경을 활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종교성에 붙들려 자기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며 순종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9,10)라는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고 복음의 직무를 맡기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을 약한 자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한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신자에게 향하신 뜻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뜻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뜻은 강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도 믿는 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강한 자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기준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신자의 시각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되어 살아가는 자기의 기준으로 분별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강한 자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곡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강하게 하는 것입니까? 약한 것들을 자랑하고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는 바울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울을 약한 자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로 자발적으로 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기의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낙원에 이끌려 가는 등 여러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그러한 경험을 부러워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줄 증거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계시를 받은 일 때문에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박힌 채로 살게 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바울을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계시를 경험한 대신 바울처럼 육체에 가시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계시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뜻에 따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령 원하는 자에게 계시를 주신다고 해도 자만을 방지하기 위해 육체에 가시가 있어야 한다면 아마 계시를 사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는 이유, 그 뜻보다는 육체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게 하기 위해 세 번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가시를 주신 뜻을 바울이 알게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러한 은혜를 원한 적이 있던가요? 우리가 원하고 구하는 은혜는 나의 뜻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면서 내가 원하는 복된 인생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생을 떠나지 않을 가시를 육체에 주시고 세 번의 간구도 외면하신 채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만 하십니다.

 

 

우리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상상하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세 번의 간구를 외면하시고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이 추구하고자 하는 인생과 소원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획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은혜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하나와 개인적 관계로 연결되어 개인의 소원과 뜻을 듣고 이뤄주는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상입니다. 신을 믿는 인간과 개인적 관계로 존재하며, 개인이 착하게 행동하고 신을 잘 섬기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상이고 종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은 인간과 개인적 관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여기셨고,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백성으로 여기셨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개인적인 차이로 인한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행동 여부가 은혜와 복의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28-29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까 서로 화합하여 평화를 이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 헬라인으로, 종으로, 자유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택한 자라는 이유 하나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같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인간의 외적인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두가 하늘의 유업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의 조건을 따지며 사도 됨을 평가하는 것은 자신들이 어떻게 신자의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신자로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람의 업적이나 행동에 따라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일도 하나님께 선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가 의로움이 되어 거룩한 성도로 여기시는 자비와 사랑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인간의 선한 일과 업적으로 이름과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믿는 자를 강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를 강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일을 이루어 가면서 누구를 높이고 자랑할까요? 당연히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특별해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할 것이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로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24:15-17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이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으시고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개인적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선지자라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에스겔을 개인적 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신 이유는 선지자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아내를 빼앗으시고 울지 말라고 하신 것도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로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개인의 입장과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안겨줄 뿐입니다. 불행을 느끼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에게 기쁨이 된 것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 주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뜻을 둔다고 했습니다. 강한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강한 힘을 가졌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강한 힘을 가지면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살려고 하는 세상의 속성만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도 강한 힘을 얻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게 되면 무엇을 하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했다는 것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행하고 이룰 힘이 없는 약한 자임을 알게 되면 주를 의지하게 됩니다. 주를 의지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되어진 모든 것을 주의 능력의 결과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관여하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심을 믿으면서 주가 능력이 되신다는 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 주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이 성도이며 그러한 성도 됨을 고린도 교회에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약함과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생명과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원한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예수는 입술에만 있을 뿐이고 마음은 여전히 자신을 향하여 있는 종교인의 호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구제와 선교 등의 활동이 많은 교회는 그것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증거물로 자랑합니다.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성경에서 계시 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가?’입니다.‘바울의 말에서 드러나는 신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아는가?’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에는 인간의 강함이나 능력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강한 자가 되라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을 아는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자의 모습은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약한 것을 자랑하여 자신의 신자다움을 보여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답다는 자신의 가치에 붙들려 있는 것이고 약함을 자신의 강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약함에서 실망과 낙심을 느낍니다. 약함을 인생의 실패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 약함과 강함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약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는 약한 것에서 알게 되는 기쁨이 있는 그것이 바울이 품고 있던 강함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무시하고 거짓 사도들을 용납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사도를 평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스스로 외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바울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것으로 채우셨다면 어땠을까요?‘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말은 그저 공허한 의미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그것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부러움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면서 인간의 약함을 알게 하시고, 반대로 낙심과 실패를 느낄 수밖에 없는 삶에서 진정한 인간의 약함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능력만 의지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을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자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주의 일에 방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되기에 약하게 하심을 알게 된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고 이 기쁨이 신자에게 강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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