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6 18:50

(72강)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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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2:12

고후 12:12http://onlycross.net/videos/co2/co2-1212.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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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설교>

본문의사도의 표라는 말에서는 사도임을 확신시키고 확증할 수 있는 특징 또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사도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표를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사도의 표에서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일반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기적과 같은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참된 사도라면 일반 사람과는 달라야 하고, 그것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는 특별한 권능의 모습과 현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구약에 등장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들이 지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차치하더라도 바울처럼 우리를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서 낙원을 보여주신다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만 의지하면서 참으며 소망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만이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유명 인물들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지 묻습니다. 땅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대한 증거로 제물을 쪼개고 그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는 것을 보이십니다.

 

 

6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드온을 불러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말씀에 자신은 가장 작은 자라고 하면서 자신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말씀하시는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사르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기드온은 이 표징으로 만족하지 않고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기드온의 요구대로 표징을 보여주자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나 도우심이 이런 기적적인 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표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기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보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표적 신앙에 따른 요구였던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유대인들만의 신앙 특징이 아닙니다. 지금도 대개의 기독교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표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성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믿음에 따른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신자 됨의 증거, 표라고 가르치고 교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말에 고후 4:19-20절의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는 바울의 말은 좋은 인용 구절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사도가 말하는 표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표를 누가 보더라도 사도임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는 표 또한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서는 표적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12:39-40절을 보면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 즉 어둠 속에 갇혔던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흘 동안 어둠에 계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병 고침을 비롯하여 오병이어 등의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표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은 기적의 사건들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은 기적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기적의 사건들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어둠에 붙들린 저주의 존재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가심을 증거하는 기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표적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의 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를 사도로 알아보지 못하고 보이고 나타나는 외적인 것을 사도의 표로 삼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바울이 사도로 부족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기적으로 여기는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사도의 표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십자가만이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자신의 능력으로 나타내고 증거 할 수 있는 표적은 없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자신에게서 신자의 표를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자라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신자의 표를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에 붙들려 있습니다. 자기 집착이고 자기 사랑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자의 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자의 표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 표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신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선한 일을 행하고 죄를 멀리하는 등 자신에게서 나오는 행위들을 근거로나는 하나님이 택한 신자가 맞는가?’라며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담고 있는 십자가 사건 외에는 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도 구원을 받은 신자의 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돌아보며 구원의 표를 찾는 것은 결국 표가 짐이 되는 결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죄의 모습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에 갇혀 살아갑니다. 예수를 알게 되고 십자가 복음에 눈을 뜨게 된다 해도 죄에 갇힌 인간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신자다운 삶을 살게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백번 천번 확인한다 해도 확인되는 것은 죄에 갇힌 현실일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유일한 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다른 복음의 유인일 뿐입니다. 결국 신자의 표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의 유인에 이끌려 가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자의 표로 제시하는 기준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수준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구분할 기준을 인간이 만들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확인하기 때문에 행실에 따라 신자의 표를 갖춘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에게 신자의 표, 증거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2-3)라는 말씀 하나만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더러운 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은 자라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이루어지고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는 시대의 사람은 다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상식을 근거로 인간 위주의 해석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령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성화론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라고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라면 이러한 기준 아래에서 신자의 표를 확인하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차라리 신자의 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을 통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한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16:25절을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으로 바른길이라 알고 그 길을 열심히 가지만 필경은 사망으로 끝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으로 알고 열심히 그 길을 갔을 뿐이라는 사정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에 있는 그들만 건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길을 생명의 길로 착각하는 것이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이것이 바르다는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신자는 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바라본다 해도 그 자리는 피 흘리신 주의 십자가 앞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 자존심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이 뭉개지는 십자가 앞에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표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표를 확인하려는 것은 여전히 자기 가치를 확인하고 자존심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사도의 표가 되는 것으로 말한 모든 참음, 표적, 기사, 능력은 바울이 행한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유일한 표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이 어떤 기적의 사건을 행했다 해도 사도의 표로 제시할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십자가에만 모든 가치를 두고 집중하는 것이 사도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사도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도의 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표적인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마음 두는 것이 사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사도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 또한 십자가에 마음을 두지 않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래도 행함에서 신자의 표가 될만한 것을 찾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행함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아주실 선한 열매가 맺어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열매라는 것은 기독교 신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물론이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서도 있는 것들입니다. 어찌 보면 그런 선한 열매는 오히려 기독교 밖에서 더 왕성하게 맺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8절에 보면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세상이 인정하는 도덕과 윤리의 행동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착하게 살지 않으면 천국에 준비된 세마포 옷이 더러워지거나 없어지는 것일까요? 이것이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결국 옳은 행실을 신자의 표로 여기고 그것으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행실이나 되어지는 일에서 찾습니다. 옳은 행실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믿음과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고 자기의 일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으로 간주하면서 신자의 표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을 믿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세상이 원하고 인정하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세상이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알고 싶다거나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세상의 입맛에 맞는 교회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통해서 교회 됨을 나타내려고 하는 교회도 많지만 그것들은 결단코 교회의 표가 되지 못합니다.

 

 

선한 일은 표적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으니까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시면 됩니다. 다만 그것을 신자의 표로 생각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 믿음을 확인하려고는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 속한 자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만 마음을 두자는 것입니다. 사도의 표든 신자의 표든 그것은 성령의 개입과 일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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