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9 18:17

(5강) 사도의 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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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6-7

고후 1:6-7http://onlycross.net/videos/co2/co2-01060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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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설교>

사도 바울이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는 말을 했습니다(고전 10:22). 주가 우리보다 강하시다는 뜻인데 당연한 말이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으로는 늘 부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의 강하심 안에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 된 것 역시 주의 강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 사도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강하신 능력으로 사도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인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사도인 바울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평안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더 위대한 신앙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마치 훈장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선교에 대해서도 평안한 지역보다 고생과 어려움이 예상되는 지역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환난 당하는 것을 고린도 교회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환난을 당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고린도 교회에 위로와 구원이 된다는 것일까요? 또한 바울이 위로를 받는 것도 고린도 교회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과 디모데의 환난과 위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위로와 구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위해 삽니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도 자기 구원에 초점을 둡니다. 혹시 환난과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연단하여 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물론 환난과 고난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본인의 믿음의 유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면 사도의 환난은 교회와는 무관한 사도 개인의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먼저 생각할 것은 사도의 환난이 고린도 교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위로와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의 환난 당함이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와 구원이 되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의 환난을 사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역사 속의 위인이 고난을 겪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처럼 사도의 업적 역시 고난을 통과함으로 가치가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환난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처럼 신자도 어떤 환난과 고난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일반 교인이 평범하게 회사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며 예수를 믿는 것은 사도의 환난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까요? 단지 오래전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인생사로 이해하고 넘어가든지 아니면 인생을 살면서 추후에 신앙으로 인한 고난이 주어졌을 때 묵상하면 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성경을 현재의 자기 형편에 맞추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말하지만 그것도 머리에 박혀 있는 종교적 신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살아있지 않은 상징적 존재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얄팍한 종교적 신념으로 하나님도, 예수님도 살아 계시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현실은 하나님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신앙한다고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에게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높이며, 세상과 동일하게 인간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현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신앙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된 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신앙하는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신으로 취급하면서도 초라한 자기 지식과 신념에 붙들려 마치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신앙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자신의 실상을 간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어려운 문제입니까? 쉬운 문제입니까? 어려운 문제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신앙인답게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물론 신앙인답게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시각에서저 사람은 정말 신자답다라는 칭송을 듣게 되는 실천과 행함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렵다는 것을 뛰어 넘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이유는 성경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 있어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을 우리의 현실에서 만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앙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나타내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며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성경을 아무리 본다 해도 한낱 기독교 경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우상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상은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욕망의 충족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우상의 개념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역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망에 갇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6절에서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라고 말합니다. 역사한다는 것은 일한다는 뜻입니다. 위로가 신자 속에 역사하여 사도가 받는 고난을 견디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위로와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대개 이해하는 위로는 괴로움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는 우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는 결과로 주어지고 느끼는 것이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과 고난을 견디게 하는 능력이 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변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와 감정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고난을 견디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위로를 심리적이고 감정적이지 않은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받는 것 같은 고난도 견디게 하는 능력이 되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의 무엇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위로가 신자 안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환난 중에 어떤 위로를 받았을까요? 4절을 보면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환난 중에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환난이 끝나면 평안을 주신다거나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보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고난 받는 바울에게 위로가 되는 다른 말씀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아예 다른 것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의 위로는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라는 것이 기독교의 틀에 박힌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정답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도무지 실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말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52:9-10절에 보면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다는 말을 할 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끝내고 평화로운 삶을 주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라고 말하며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황폐한 예루살렘이 어떻게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황폐하게 한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말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반발만 일으키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52:7절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별로 실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예루살렘 황폐하게 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평온한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이지만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그 사실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한 것입니다.

 

 

5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값없이 팔렸고 돈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속량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순전히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것이 값없이 바벨론에 팔려다가 돈 없이 속량되는 과정을 통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현실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값없이 팔렸다가 돈 없이 속량되게 하실 것을 믿는 자일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 없이 속량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현실로 실현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서 이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한 것이 참된 현실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는 것이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위로가 그리스도였다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으로 부딪히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인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과 일하심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원하지 않은 현실로 인해 원망과 불평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난을 견디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에 처한 현실만 생각하고 바라보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록 서툴고 미약하지만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영원한 위로는 세상 것이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됩니다.

 

 

7절에서 너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로 넘치는 위로에도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일하심을 알게 합니다. 현실만 생각하면 힘든 인생이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위로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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