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6 16:05

(9강) 아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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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15-22

고후 1:15-22http://onlycross.net/videos/co2/co2-01152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설교>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한 계획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계획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어 간다는 분명한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선한 계획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가령 세상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뜻을 둔 계획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이루게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계획,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계획은 자신을 위한 욕망과 무관하게 봉사와 헌신을 위한 계획이기에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선한 계획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의 계획인 것이지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한 계획을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에게 선한 계획은 없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이 선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세상의 시각에서 선할 뿐이지 하나님이 인정하실 선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만 선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선으로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계획이나 뜻과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의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들이 많은 것입니다. 8장의 내용처럼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의인들이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이 있는 현실을 하나님의 선한 행위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현실은 늘 충돌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기 계획이 있었습니다. 15-16절의 내용대로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마게도냐에서 다시 고린도로 간 후에 고린도의 도움을 받아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이 고린도를 두 번 방문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기 계획을 고린도에 전했습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합니다.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지 못하고 마게도냐에서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계획을 변경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당시 이름 있는 인물을 추종하는 분파가 있었고 그 중에 당연히 바울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추종하는 인물을 더 우월한 존재로 부각시켰을 것이고 이로 인한 갈등과 충돌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반대하는 파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를 찾아간다면 분파 사이의 분쟁은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앞세워 자기를 과시할 수 있고 반대파는 더 심하게 바울을 비난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가기로 한 계획을 변경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경 이유에 초점을 둔다면 그것은 이유가 정당하면 계획 변경도 정당하고 이유가 정당하지 않으면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우리에겐 정당한 이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고자 하는 자기 계획을 알렸으나 그 계획대로 실행하지 않았을 때 바울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요?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반대파에게는 또 다른 비난의 좋은 이유가 됩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 말을 바꾸는 사람, 신실하지 않은 사람, 말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 등등 비난할 이유는 많습니다. 사도라면 일반 사람보다 더 신실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17)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눈앞의 이익을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가볍고 신중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19,20)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예와 아니오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나에게 유리한 일은로 받아들이고 불리한 일은아니오로 밀어 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택입니다.

 

 

그런데예와 아니오가 처음 선택한 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예가 되었던 일이 나중에는 아니오가 되고 또는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리한 일이 나중에 불리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예와 아니오는 철저하게 자기 이익에 따라 변동되는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라 함이 되지 않는 오직 예만 된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합니다. 도무지 아니오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고린도를 두 번 가고자 했던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한 것과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먼저 바울이 계획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에 속해 있다면 분명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는 신실하지 못하고 말이 가벼운 사도로 비난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사도다운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사람이다는 인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복음에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누군가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 되면 그가 복음을 말한다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람을 신뢰하게 되면 그의 말 또한 내용을 떠나 무작정 신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이유로 목사들이 윤리와 인품, 선함 등을 소위 자기 목회에 이용합니다.‘우리 목사님은 인품이 훌륭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목사의 말을 복음과 상관없이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규정하는 선함이 복음의 또 다른 장애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말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는 바울을 향한 비난은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신뢰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답지 못한 바울이 전한 복음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예만 되었다는 것은 아니오가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 때문에 고린도에 가고자 했던 계획을아니오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오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인간이나 인간의 계획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고린도에 두 번 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비록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행하는 성품이라 해도 복음에 유익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계획은 경솔히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한 계획도 아닙니다. 교회로 하여금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는 사랑에 의한 계획입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 해도 바울의 이런 계획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계획대로 실행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래의 계획대로 고린도에 두 번 간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고, 한번만 간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아니라 아니오로 일관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사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행함을 예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함정에도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누군가가 계획을 세웠다가 바꾸게 되면 비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그러면 말을 수시로 바꿔도 된다는 것인가?’라는 시비를 건다면 여전히 사람을 보고 있고 행동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습성에 매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바꾸는 사람과 한번 내 뱉은 말에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가가목사답다’‘목사답지 못하다로 이어지는 것이고 복음을 훼방하는 결과까지 초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예가 되기도 하고 아니오가 되기도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아멘은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멘의 참된 의미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항상 대립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인 반면 우리의 뜻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멘은 나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은 부인되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원래의 계획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사도직에 대해서까지 의심하며 그의 말을 외면한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의 계획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일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시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으로 일하신다는 현실에 둔하기 때문에 사람이 갖춘 자질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일반적 오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했던 일은 원망입니다. 원망과 함께 먹을 것을 원하고 고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인간됨을 높이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였습니다. 약속을 위해서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아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아멘이 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심판의 존재로 집결됩니다. 비록 세상이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높인다 해도 심판의 존재일 뿐입니다. 때문에 좋은 인간성과 성품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만 보면 됩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지 좋은 도구, 나쁜 도구로 나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고 수시로 말을 바꾼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다 해도 우리의 성품이나 자질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일까요? 반대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지고 지키며 성품 또한 훌륭하다면 믿음이 있고 구원 받을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신실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이 자기 계획을 지켜서 고린도에 두 번 방문했다면 고린도 교회에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구원 받는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몇 번을 가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의 계획과 계획대로 실천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될까?’라는 고민을 한다면 결국 자신의 행위에서 자기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3:14-16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차든지 뜨겁든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찬 것과 뜨거운 것을 혼합하여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 냅니다. 때문에 우리는 토하여 버림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자는아멘하며 인간적인 모든 방법이 부인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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