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7 18:27

(12강) 사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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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2:1-4

고후 2:1-4http://onlycross.net/videos/co2/co2-0201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설교>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여러 가지로 답할 수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이론적 설명일 뿐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분명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신자는 분명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설교와 성경 공부를 통해서 얼마든지 머리에 저장하여 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성경 내용을 머리에 담고 있습니다. 복음적이지 않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도 구별하고 판단할 수준에 있는 신자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면 답을 주면서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소위 성경을 많이 아는 것입니다. 아마 천국이 수능시험처럼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인정받은 자만 허락되는 것이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신자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이 쓸모 있는 조건으로 활용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 아는 정도나 수준이 천국의 여부를 결정짓는 일에 도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원에 있어서는 신학공부도, 성경공부도 무능합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한 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거나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런 말이 신학공부나 성경공부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만약 신학공부나 성경공부의 목적이 구원에 있다면 맞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성경공부든 무엇이든 인간의 모든 것은 무용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신학과 성경공부 속에, 교회 속에, 우리의 열심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것과 같은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과의 자기 일치를 통하여 나 자신이 악함의 본질이라는 사실과 주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쓸모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공부입니다. 그리고 가장 존귀하고 비밀한 십자가 은혜가 나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로 기뻐하게 되는 경험이 있음으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희미하게나마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내용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이면 그것은 종교적인 이론에 머물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을 두고 생각했을 때 십자가 죽음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가치 없는 죽음이고 따라서 인생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구원을 말하고 예수를 찬송한다 하지만 관심은 자기 구원으로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 인간성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생명의 자리로 끌어가십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게 되면 생명의 가치보다는 권력과 재물에 가치를 둘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인생의 확대와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생명이 아닌 권력과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이고 이들에게 복음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저 성경이야기로 다가올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믿음을 주관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섰다면 믿음의 주관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일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심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믿음은 인간의 행함을 보지 않게 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든 드러나는 모든 것은 주의 뜻임을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삶에 영향을 주고 삶으로 표출되는 한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강조하고 믿는다 해도 행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에게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주가 아니라 관념에 머무른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인간의 행함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고 행함을 기준하여 믿음의 수준과 질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지 못하기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역사 또한 믿지 못하는 것이고 보이는 인간의 행함에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주였기 때문에 믿음은 자신이 아니라 주가 하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이나 타인의 믿음에 대한 시각이었기 때문에 사도가 믿음의 주관할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도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음을 주관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살아계신 주께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고린도 교회에 믿음의 주관자로 서고자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내가 세웠다는 의식이 있을 수 있고, 교회의 주인처럼 행세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사도인 자기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는 그리스도가 관념에 머무른 것이었다면 분명 그러한 모습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1-3)는 말을 합니다.

 

 

앞에서 바울은 교회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것도 그들의 기쁨을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을 근심하게 한 것에 대한 바울의 심정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게 되거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게 되거나,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책망의 말로 받고 근심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인데 그 편지를 보낸 이후에도 교회의 믿음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직접 방문하여 그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고후 13:1-2절에 잘 나타납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감정적인 분노라기보다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에 대한 걱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심정은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복음의 길로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의심하고 반대했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바울에게 마음에 눌림이 되고 걱정이 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문제 하나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나타난 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입니다.

 

 

교회가 바울을 비난하고 의심하였다 해도 그것이 지옥 가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인 바울을 비난하면 안된다는 기준이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누구를 비난하든 비난의 이유, 방향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가치보다 나 자신의 존귀와 가치에 마음이 향해 있을 때 나타나는 비난이라면비난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가 죄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바울에게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복음에서 벗어나 있는 실상에 대해 책망하는 편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복음에 거한다면 바울의 책망은 희망이 인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책망 때문에 근심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로 인해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쓴 것은 구원 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과 염려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믿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면 구원에 대해 불안해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바울과 같은 사도로부터 책망의 편지를 받는다면 불안과 염려는 더욱 가중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24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상태의 교회를 두고 믿음에 섰다고 말하는 것을 적어도 그들의 구원 문제로 인한 불안과 염려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보다는 교회의 구원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용서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구원 문제로 인한 불안과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대신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 없는 거룩한 신분으로 삼으신 용서의 은혜로 인한 감사가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책망은 감사가 있는 용서의 은혜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기쁨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의 기쁨을 도움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했던 것이며 이 기쁨을 위해 책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누리고 있는 용서의 기쁨에서 함께 동일한 기쁨을 누리고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넘치는 사랑이며 이 사랑 때문에 많은 눈물로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구원은 복음의 능력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나타나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일까요? 이것이 관심을 인간에게 두고 있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나타나시고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된다면 복음 앞에서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는 부인되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구원의 능력이 되고 공로가 되는 그리스도만 높여야 합니다.

 

 

1:24-25절에 보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용서의 자리에서 주만 높이게 하심으로 영광이 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인간은 실패한 존재, 순종하지 않음으로 지옥 갈 존재로 드러나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한 것처럼 죄가 죄로 드러날수록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스릴 평강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음은 언제나 책망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책망으로 다가오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목사가 교인들의 믿음을 주관하고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책망은 책망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신자에게 책망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넘치는 사랑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신자의 사랑은 복음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높이지 않고 근심하게도 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책망으로 다가오면 나는 구원 받은 신자인가?’라는 불안과 근심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지 못할 자를 구원하신 복음의 능력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근심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심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용서의 은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불안과 근심이 용서의 은혜로 인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입니다.

 

 

인간에게만 마음을 두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령 근심에서 벗어난다 해도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무관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로 증거 된 용서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용서의 자리에서 용서의 은혜를 우리의 심령에 굳게 세우기 위해 책망하고 또 책망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책망을 받으며 구원 될 자격이 없는 자를 십자가로 부르신 사랑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 김희곤 2019.12.10 06:28
    귀한 목사님을 통하여 복음을 흘려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모님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목사님 음성파일 첨부 부탁드립니다.)
  • 신윤식 2019.12.12 09:47
    감사합니다. 파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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